광장의 남쪽 구석을 빠져나가면 바르샤바 성요한 대성당(Archikatedra św. Jana w Warszawie) 앞을 지난다. 바르샤바 구시가지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바르샤바 대교구의 모교회이기도 하다.
14세기에 마소비안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에서 마조프셰 공작의 대관식이 거행됐고, 공작들의 묘소가 들어있기도 하다. 마조프세 공국(Księstwo Mazowieckie)은 1138년 폴란드왕국이 해체될 때, 동북쪽 강역에 들어선 나라로 1526년에 들어선 야기에우어(Jagiełło) 왕조의 폴란드 왕국에 다시 통합됐다.
1620년 미카우 피카르스키(Michał Piekarski)가 성당 앞에서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은 뒤, 안나 야기엘론카(Anna Jagiellonka) 여왕은 궁전과 성당을 잇는 80m 길이의 통로를 설치하기도 했다. 교회는 19세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재건축됐지만 영국식 고딕 리바이벌 양식이 보존됐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저항군과 독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장소다. 독일군이 폭발물을 실은 탱크를 투입해 폭발시키는 바람이 건물의 상당부분이 파괴됐고, 봉기 진압 후에는 나머지의 대부분을 추가로 파괴했다. 지금의 성당은 전쟁이 끝난 뒤에 재건된 것이다. 다만 전쟁 전의 모습이 아니라 17세기 초에 그려진 호겐베르크(Hogenberg)의 그림과 1627년에 그려진 아브라함 부츠(Abraham Boot)의 그림에 담긴 14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으로 재건된 것이다.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한 뒤에 독일군이 저지른 바르샤바 파괴행위로 인해 성 요한 교회 내부의 웅장한 장식과 팔마 일 지오바네(Palma il Giovane)가 그린 제단화 ‘세례요한과 스타니스와프 성인(St. Stanisław)과 함께 있는 성모자’ 그리고 장-조셉 빈아체(Jean-Joseph Vinache)가 조각한 말보르크 지방관(Województwo malborskie), 얀 프란시스첵 비엘린스키(Jan Franciszek Bieliński)의 대리석 흉상 등이 사라지고 말았다.
새로 지은 성 요한 성당의 내부는 내부 장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원래의 고딕 양식으로 지었기 때문에 전쟁 전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본당 건물에는 3개의 통로가 있는데, 2개의 측면 통로가 주 통로와 같은 높이다. 1959년에 세운 강단은 요제프 트레나로프스키(Józef Trenarowski)가 파괴된 요한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의 바로크 양식의 강단을 복사해 제작한 것이다. 정면에서 오른쪽에 종탑이 위치하고 그 아래에 지에카니아(Dziekania) 거리로 나가는 통로가 있다.
성 요한 대성당을 지나면 바르샤바 왕궁(Zamek Królewski w Warszawie)이다. 왕궁은 수 세기에 걸쳐 폴란드 군주의 거처였다. 마조프셰(Mazowsze) 공작의 거처로 시작한 궁전은 16세기에 출범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시절에는 의회로 사용됐다. 이후 스웨덴, 브란덴부르크, 프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의 군대가 침략해왔을 때마다 약탈을 당해 황폐화됐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독일 총독의 거처로 사용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폴란드 대통령 이그나치 모스치츠키(Ignacy Mościcki)가 사용했다.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 역시 왕궁을 약탈하고 불태웠는데, 1944년 바르샤바 봉기가 실패한 뒤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1971~1984년에 미국에서 받은 기부금을 바탕으로 바르샤바 시민위원회가 재건을 주도했다.
바르샤바 왕궁은 13세기 말, 지금의 WZ노선이 지나는 카미온카 강이 비스와 강에 합류하는 지점의 제방에 나무와 흙으로 된 요새를 쌓은 것에서 유래한다. 마조프세 공국의 콘라드 2세(Conrad II)는 작은 의회(라틴어: Curia Minor)라는 나무와 흙으로 된 집을 지었다. 14세기 초 트로이덴(Trojden, 1314~1341) 공작은 이곳을 거처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 카지미에르 1세(Kazimierza, 1349~1374) 시절에는 도시 요새와 건물을 벽돌로 짓기 시작했다. 남쪽에 방어와 주거 목적의 거탑(라틴어: Turris Magna)을 지었다.
1526년 마조프세 공국이 폴란드왕국에 통합되었을 때 마조프세 공작의 성을 왕실이 사용하게 됐다.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인 지그문트 1세의 2번째 아내가 된 이탈리아인 보나 스포르자(Bona Sforza) 왕비는 1548년부터 3딸과 함께 바르샤바 왕궁에서 살았다. 3딸 가운데 이자벨라(Izabella)는 뒤에 헝가리 왕비가 됐고, 카타르지나(Katarzyna)는 스웨덴의 왕비가, 그리고 안나 야기엘론카(Anna Jagiellonka)는 뒤에 동생인 폴란드 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사후에 폴란드 여왕이자 리투아니아 공작이 됐다.
1556~1557년과 1564년에는 폴란드 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가 소집한 의회가 바르샤바의 왕궁에서 열렸다. 폴란드 왕국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연합한 루불린 연합시절에도 바르샤바 성에서 정기적으로 의회를 열었다. 1569~1572년 사이에는 건축가 지오반니 바티스타 디 쿠아드로(Giovanni Battista di Quadro)와 지아코포 파리오(Giacopo Pario)에 의해서 성을 개조했다.
뒤를 이은 지그문트 3세는 왕실을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이전하면서 1598~1619년 사이에 바르샤바 왕궁을 확대했다. 지오반니 트레보노(Giovanni Trevano)가 설계를 맡았다. 1619년 서쪽 성곽 90m를 새로 지었으며, 높이 60m에 달하는 새로운 왕궁 탑을 지었다. 지그문트 탑이라고 부르는 이 탑에 올린 첨탑의 높이는 13m이고 탑의 꼭대기에는 구리로 된 판에 금박을 입힌 바늘을 가진 시계를 달았다.
지그문트 3세를 비롯한 바사왕조의 후계자들은 동양의 직물과 태피스트리를 비롯해 티치아노, 베로네세, 틴토레토, 렘브란트,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얀 브뤼헐(Jan Brueghel the Elder) 등,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들을 수집했다. 이렇듯 화려한 예술작품들은 17세기 폴란드를 침략한 스웨덴과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등에 의해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 뿐만 아니라 왕궁 역시 파괴됐다. 무너진 바르샤바 왕궁은 폴란드왕실의 열악한 재정 상태와 반복된 스웨덴과 러시아의 침략으로 18세기 초까지 방치됐다.
1717년 의사당이 재건돼 작센 통치자들의 대관식에 사용됐으며, 1733년 작센의 선제후 아우구스투스 3세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면서 바르샤바 왕궁의 재건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1764년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투스(Stanisław II Augustus)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궁은 화려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쿱 폰타나(Jakub Fontana) 등 일류 건축가들과 마르첼로 바키아렐리(Marcello Bacciarelli) 등 저명한 조각가들을 고용해 성을 재건하고 내부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장식했다. 1777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투스 왕에게 화려한 청동 제단을 보냈다. 이 제단은 오늘날 콘서트 홀로 사용하는 왕실의 새 예배당에 설치됐다. 왕궁에는 3200점의 그림을 비롯해 고전주의 조각들, 10만 점의 그래픽과 메달, 동전 등 수많은 왕실 컬렉션이 소장돼있었다.
하지만 1722년 폴란드왕국의 분할 이후에 폴란드는 프로이센, 프랑스, 러시아 등의 침략을 받게 된다. 특히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열린 비엔나회의의 결과 성립한 폴란드 입헌왕국의 내정을 간섭하던 러시아가 1830년 일어난 무장봉기를 제압한 뒤에 총독을 세우고 군정을 시행했다.
이때 왕궁에 주둔한 러시아 군대에 의하여 곳곳이 파괴되고 황폐화됐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독일군 사령관의 거처가 됐다가 종전 후에는 폴란드 대통령의 관저가 됐다. 이 시기 왕궁은 복원이 이뤄졌고, 러시아가 왕궁에서 약탈해간 가구와 예술품 등을 반환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진주한 독일군은 조직적으로 왕궁을 파괴했고, 귀중품을 약탈해갔다. 1939년 10월 4일 베를린으로부터 바르샤바 왕궁을 폭파하라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명령이 내려왔다. 역사 및 예술전문가가 포함된 특별부대가 도착해 왕궁을 해체하고 벗겨진 벽에 폭약을 설치했다. 해체과정에서 스타니스와프 로렌츠(Stanisław Lorentz) 교수가 이끄는 폴란드 박물관 직원과 미술 복원 전문가는 총격의 위험 속에서 많은 예술 작품과 치장벽토 조각, 쪽모이 세공 마룻바닥, 나무판넬 조각을 반출해 뒷날 복원에 사용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바르샤바 왕궁의 유물을 보관하는 작업이 시작됐고, 복원작업은 1971년 시작했다. 1974년까지 복원된 바르샤바 왕궁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전면은 길이 90m로 왕궁 광장을 향하고 있다. 중앙에는 지그문트 탑이 위치하고, 전면의 양끝에는 뾰족한 첨탑이 있는 사각형의 탑이 있다. 복원된 왕궁 내부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하던 방에는 리투아니아에서 시작하여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부 유럽지역을 통치했던 야기에우워 왕조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폴란드 민주주의의 중심이 된 국회의사당이 있다. 이 방의 장식은 지오반니 바티스타 디 쿠아드로(Giovanni Battista di Quadro)가 만들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더 로얄 아파트먼트는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Stanisław Augustus Poniatowski) 왕이 거처하던 곳이다. 마르첼로 바키아렐리(Marcello Bacciarelli)의 그림 4점이 걸려있다. 1994년 카롤리나 란츠코론스카(Karolina Lanckorońska) 백작이 왕실에 기증한 37점의 그림을 걸어놓은 란초코론스키 컬렉션에는 ‘유대인 신부의 아버지’와 ‘유대인 신부’ 등,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 두 점이 포함된다.
바르샤바 왕궁의 앞으로 왕궁 광장이 펼쳐진다. 바르샤바 구시가의 남쪽 입구가 있던 것으로 카미온카 강이 흐르던 협곡을 따라 구시가의 성벽이 남아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바르샤바의 유명한 표지가 되는 지그문트 기둥(Kolumna Zygmunta)이 서있다. 1593년 폴란드의 수도를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긴 지그문트 3세 바사(Zygmunt III Waza)를 기념한다.
스웨덴 왕 요한 3세(Johan III)와 폴란드왕국의 카타르지나 야기엘론카(Katarzyna Jagiellonk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절정을 맞았지만,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이후 폴란드왕국의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아들 우와디스와우 4세 바사(Władysław IV Vasa)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콘스탄티노 텐칼라(Constantino Tencalla)와 조각가 클레멘테 몰리(Clemente Molli)의 설계로 세웠다. 현대사에서 기둥의 형태로 처음 세워진 인물 대상의 기념비다. 기단 위에 코린트 양식으로 만든 8.5m 높이의 붉은색 대리석 기둥을 세우고, 고풍스러운 갑옷을 입은 왕이 왼손에는 십자가를 치켜들고 오른 손에는 칼을 쥔 모습을 2.75m의 높이로 주조했다. 지그문트 기둥의 전체 높이는 22미터에 이른다. 받침대에는 네 마리의 독수리가 장식돼있다는데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받침대의 네 면에는 지그문트 3세 바사를 찬양하는 라틴어 문구를 새긴 동판을 붙였다.
지그문트 기둥은 1743년, 1810년, 1821년, 1828년, 1863년, 1887년, 1930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개조됐다. 기둥 주변에 나무 울타리, 쇠 울타리, 트리톤이 있는 분수 등을 교대해 설치하기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 독일군이 지그문트 기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동상과 기둥이 심하게 파손됐다. 전후 동상을 수리하고 스트리제곰(Strzegom) 광산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만든 새 기둥 위에 세웠다. 깨진 기둥은 왕궁 옆에 뉘어놓았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