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숨비소리길

제주도에서 1년…숨비소리길

기사승인 2019-10-12 00:00:00

여행 일정이 짧든 길든 먹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제주도 1년 여행’은 3박4일이나 1주일 또는 보름 일정의 여행과는 달라서 늘 무엇인가 새로운 음식을 경험하고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을 찾아다닐 수는 없다. 제주에 올 때 ‘아침은 집에서 가볍게, 점심은 걷다가 현지에서, 저녁 역시 가능한 밖에서 먹기’로 했었다. 주방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주 여행은 제주 생활로 변하면서 그 즐거움이 나날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획과 현실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지난여름엔 열과 습도에 적응을 하지 못해 나들이다운 나들이가 거의 없었다. 오름이든 휴양림이든 두세 시간 걷고 나면 집 생각이 간절하니 부지런히 집에 돌아오곤 했다. 9월에 접어들어 날씨가 걸을만하다고 느껴지면서 연이은 태풍으로 집에 묶여 있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던 때, 준비 시간이 많이 필요한 밥, 면, 국, 반찬을 식사에서 빼기 시작했다. 아침엔 커피 내리고 달걀 삶으면 식사 준비가 얼추 끝난다. 때론 단호박이나 고구마를 찌거나 냉동실에 두었던 베이글을 데우기도 한다. 제철 과일 한 개쯤 더하면 완벽하다. 점심은 걷다가 쉬는 짬에 두유와 떡 몇 조각이면 충분하다. 걷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젠 단골집이라 할 식당에서 받는 뜨끈한 저녁 식사는 만족스럽다. 집에 있더라도 점심과 저녁은 최대한 가볍게 준비한다.

그래도 여전히 주방에는 나보다 아내가 더 오랜 시간 서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 머무는 날이면 내가 하는 식사 준비가 어설퍼 뒷정리가 더 귀찮다며 지지고 끓이고 볶는 냄새가 집 안에 퍼지곤 한다. 시시때때로 꿩이 밭담을 넘고 어쩌다 직박구리가 거실 창문에 붙은 벌레를 향해 날아와 부딪치기도 하는 함덕의 집은 세상 어느 곳보다 편안한 캠핑장이 되어가고 있다.

비서실 오른쪽에 백병원 의료원장직을 겸하고 있는 인제대학교 총장실이 있었고 왼쪽엔 재단 이사장실이 있었다. 늘 양쪽 집무실에 결재 또는 면담을 원하는 임원과 부서장들 외부의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앳된 실장이 새로 왔으니 처음 본 사람들은 늘 내 살아온 이야기를 묻곤 했다. 열차 차장을 하다가 군복무까지 마치고 대학을 가고 이름도 모르는 잡지사에 근무하다 비서실장으로 앉아 있는 내 이야기가 흥미로웠던지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묻고 또 물었다. 총장실이 비는 날이라야 사무실이 잠잠했다.

단 한 번도 아침에 출근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일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사무실에만 들어오면 하루 종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 때문에 누군가 들어오면 여직원 얼굴부터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여직원은 그 때마다 쪽지로 알려 주며 위기를 모면하게 해 주었다. 퇴근 무렵이면 온 몸이 무너질 듯 피곤했다.

인제대학교백병원 비서실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채 겨울이 지나기 전쯤 또 몸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부터인지 화장실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소변 문제였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불편함 때문에 도무지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며칠을 참다가 점심시간에 인근의 비뇨기과의원을 찾아갔다. 상담을 하고 소변검사를 의뢰했다. 검사결과 전립선에 염증이 생겼다며 주사와 항생제 그리고 전립선 마사지 처방을 해 주었다. 이 주일 가까이 진료를 받아도 여전히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조금 더 효과 좋은 약을 써 보자고 하는데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약값이 비싸다고 한다. 다시 이 주일이 지나도 증상 개선은 없는데 난데없이 설사가 시작되었다. 의사는 전립선에 직접 주사하는 약을 권했다. 매우 비쌌다.

병원에 돌아와 우연히 비뇨기과의 노 교수를 만나 사정 이야기를 했다.
“무엇 때문에 외부 의원에서 진료를...”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비서실장이 비뇨기과 진료 받고 있다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서요.”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요. 그래, 약은 얼마나 먹었어요?”
“4주 정도 됐습니다.”
“그러면 내가 시켰다고는 하지 말고 약 그만 먹어요. 그 주사도 꼭 필요하지는 않고. 곧 괜찮아 질겁니다.”

약을 끊고 며칠 지나자 거짓말처럼 다 편안해졌다. 이래저래 세상 헤쳐 나가기 쉽지 않은 몸임을 다시 확인했다.

세화해변에는 세화오일장을 핑계로 자주 간다. 김녕해변을 거처 세화까지 해안 길을 달리며 보는 바다풍경이 아름다워 가끔은 차를 세우고 바다색을 살피기도 한다. 평대리 해안도 세화 못지않게 아름답지만 오일장이 없으니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세화의 제주해녀박물관을 언제고 가보겠다고 생각을 하던 차에 숨비소리길을 알게 되었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속 작업을 마치고 물위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쉴 때 내는 소리다. 세화장날을 택해 장도 보고 해녀박물관과 숨비소리길을 걷자고 길을 나섰다. 9월이 끝나가면서 바다 물빛은 예전만큼 예쁘지는 않았지만 바라볼만했다. 장터를 한 바퀴 돌며 필요한 물건을 사고 바다를 보다가 해녀박물관에 가니 휴관일이다.

해녀박물관 앞은 공원이다. 초록의 잔디밭은 편안하게 넓고 소나무 그늘엔 의자까지 설치되어 있으니 바닷가의 놀이가 싫증나면 이 그늘에서 쉬어도 좋겠다. 걷기 좋은 시간에 잔디밭 사이로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그 끝에서 해녀 불턱과 배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 모형을 만난다. 평화롭게만 보이지만 이곳 소나무 숲은 제주 4.3 사건 당시 주민들이 학살당한 곳이다. 어디를 가든 편안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제주엔 아픔도 많다.

불턱 모형 옆 ‘재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우뚝 서 있는 곳이 ‘연두망동산’이다. 1932년 1월 7일과 12일 세화오일장날에 1,000여명의 이 지역 인근의 해녀들이 일제의 수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위해 모였던 곳이다.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 당시의 해녀 대표 3인을 소개하는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당시 해녀대표는 김계석과 고순효까지 5 명이었으나 이 두 사람은 일경의 검거를 피해 옥고를 겪지 않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해 이곳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세화오일장에 올 핑계 거리를 만들어 놓고 숨비소리길을 찾아 나섰다. 숨비소리길은 해녀박물관을 출발해 밭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하도리의 별방진까지 가서 해안가의 길을 따라 해녀박물관으로 돌아오는 4.4 킬로미터의 길이다. 이 길 위에서 해녀들의 일터인 밭과 바다를 둘러보며 그 자취와 문화를 살필 수 있다. 별방진까지 가는 밭길은 해녀박물관에서 출발할 때 일부구간을 빼고는 올레21코스와 거의 겹치므로 올레표식을 따라가도 숨비소리길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제주해녀박물관을 떠나 면수동마을회관 앞의 팽나무 쉼터를 확인하고 나면 곧 들판으로 들어선다. 이 들은 평야라고 부를 만큼 넓지는 않지만 걷다가 눈을 들어 둘러보면 왼쪽 멀리 수평선이 슬쩍 보이니 제주에서 이만한 평지는 흔하지 않다. 해녀들은 물에서 뭍까지 이어지는 일터에서 때론 추위에 오그라들고 때로는 내리쏟는 햇볕에 살갗이 벗겨지도록 일해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문득 밭담이 눈에 들어온다. 밭담이 만드는 손바닥만 한 그늘이 바닷가 불턱 돌담 안의 작은 모닥불과 겹쳐진다. 그래도 걷는 이의 눈에 보이는 밭담은 예쁘다.

밭길 끝에서 하도리의 별방진 성터를 만난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성벽의 일부를 복원했으나 성벽만 반듯하게 쌓았을 뿐 성의 기능을 위한 어떤 건물이나 시설이 없으니 관광객들은 고개만 갸웃하며 지나갈 뿐이다.

고려시대부터 제주도에는 동부와 서부 해안에 9진을 설치해 석성을 쌓고 군인들을 주둔시켜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하도리의 별방진은 조선 중종 때 김녕에 있던 방호소를 옮겨 구축했다. 이곳이 우도와 함께 왜선이 정박하는 곳과 가깝기 때문이었다. 별방진의 성은 높이가 3.5 미터 성곽둘레 약 1 킬로미터 규모였고 흉년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기구까지 갖추고 있었다.

별방진의 성 흔적을 보고나면 숨비소리길은 해안도로를 따라 세화해변으로 이어진다. 하도리에서 세화까지는 특히 해변 풍경이 아름다워 힘든 줄 모르고 걷는다. 걷는 도중 해변에 설치되어 있는 불턱 등 구조물들에 관한 안내문을 읽고 바다의 구조물을 확인하며 잠시 숨을 돌린다. 길가의 바위에서든 예쁜 카페와 음식점의 창가에서든 이 바다는 보고 또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 원담인 ‘무두망개’, 해녀들이 물질을 준비하며 옷을 갈아입거나 모닥불을 피워 온기를 쬐던 불턱, 고려말 삼별초의 상륙을 막기 위해 처음 쌓은 후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유지했던 제주 해안가의 ‘환해장성’ 흔적, 테우 또는 소형 목선을 정박시켰던 작은 포구 ‘성창’, 해녀와 어부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던 해신당인 ‘갯것할망당’ 등에 관한 안내문을 읽고 나면 제주 해녀들이 어렴풋하게나마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아름다운 삼색 물빛과 오일장의 넉넉함과 해녀들의 흔적이 아련해 장날이면 마음이 달뜨며 이곳 세화에 와야 하는 이유를 찾곤 한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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