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가난한 취준생과 돈 잘 버는 증권사

[기자수첩] 가난한 취준생과 돈 잘 버는 증권사

기사승인 2019-11-29 06:15:00

‘증권맨’이 돈을 잘 번다는 흔한 인식이 있다. 일정 부분 사실이다. 증권사 일부 부서 직원들의 연봉은 수천만 원에서 수억대를 넘나든다. 한국 자본시장의 중심지에서 플레이어로 뛰며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것. 금융권 취업을 꿈꾸는 취업준비생 공통의 희망일 테다.

모두의 바람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만큼 경쟁률이 치열하다는 이야기다. 증권사 전형은 1차 서류전형 문턱 넘기부터 쉽지 않다. 그 험난한 전형 과정 중 면접과 자기소개서에서 흔히 나오는 질문이 있다. 바로 ‘역경을 노력으로 극복한 경험’에 대해서다. 최악의 취업률. 한 끗 차이로 붙고 떨어진다는 면접에서 돋보이기 위해서는 웬만한 이야기로는 면접관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대부분의 취업준비생이 이 물음에 ‘마음을 움직일 만한’ 답을 하기 위해 머리와 스물 몇 해 남짓한 전 생애를 쥐어 짜내 적어낸다.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감동적인 이야기의 전형은 소위 ‘개천에서 용 난’ 이야기였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남들 못지않게 자라준 인재의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히게 되는 것은 그 고단함에 공감하는 까닭이다. 심각한 빈부격차. 기울어진 운동장의 밑에 선 이가 위쪽에 있는 이들과 비슷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는 곱절, 그 이상의 눈물겨운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이해해서다. 

그러나 어느새 세태가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개천에서 난 용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물려버린 걸까. 금융권, 최소한 증권사 면접에서는 ‘가난은 감추는 것이 미덕’이라는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다. 면접 철이 한창인 요즈음, 어느 증권사 면접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지난 금요일, 한 취업준비생을 만났다. 대학졸업반인 그는 금융권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밝게 웃는 얼굴이 유독 인상적인 그는 유쾌한 사람이다. 그 자체로만 보고 있으면 그의 뒤에 힘겹고 그늘진 가정사가 있다는 것을 누구도 짐작 못 할 테다. 가난한 환경을 딛고 서려는 노력이 긍정적인 성격의 바탕이 됐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아르바이트 하며 다녔다. 학원 문턱 한 번 넘을 엄두를 못 냈지만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다. 취업준비에 바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사회 경험을 더 쌓고 자신만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다. 그 노력이 면접에서 질타당하기 전까지는. 

최근 증권사 임원 면접에 오른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극복한 경험을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았고, 살아온 삶으로 답했다. 그 답에, 면접을 하품으로 시작했던 고위 임원이 말했다고 했다. ‘조언’을 하나 해주겠다고. 

그 임원은 금융권에서는, 최소한 증권사에서는 없는 티 내지 말라 했다. ‘사고 낼 우려’가 있어 보이니 금융권에서 일하고 싶으면 가난하다는 이야기 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요컨대, 큰돈 굴리는 곳에서는 가난한 인재가 달갑지 않다는 이야기다. 

지나간 일이라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내던 그는 끝내 울먹였다. 

“감추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그걸 몰랐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버티며 살아온 게 저인데, 그 이야기를 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말문이 막히고, 제일 먼저 치솟은 감정은 분노였다. 당신에게는 가난이 죄인가. 어려운 환경을 오롯이 딛고, 난관 앞에서 쓴 물을 몇 번이나 삼켰을 고단한 삶. 그 모든 과정을 거쳐내고도 대견하게 자란 이 학생이 그 고위 임원의 눈에는 그저 ‘가난해서 돈을 탐낼까 우려되는 인물’로 밖에는 비치지 않았던 것일까. 합격 시켜 품에 안을 만한 인재로 보이지 않았다 해도, 부당한 상처를 안길 권리는 없다. 개천에서 난 용이 격려받던 시대는 어느새 과거의 기억이 되었던가. 좋아하는 소주 맛이 그날따라 쓰게 느껴졌다.

착잡한 마음으로 증권사 십여 곳에 연락을 돌렸다. 면접장에서 취업준비생을 대하는 ‘날것’ 그대로의 평가 기준이 기자에게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물어보았다. 가난이 감추어야 할 일인가를. 증권사 인사팀에서는 개인의 가정환경은 평가요소와 전혀 무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교육이나 인성 등의 조건 차이가 없다는 답도 있었다. 

이 원칙적이고 훌륭한 평가 기준이 왜 그의 면접에선 적용되지 않았을까. 그는 끝내 면접에서 탈락했다. 임원의 ‘조언’이 면접 불합격과 무관하진 않았을 게다. 그 임원의 발언은 그저 개인의 일탈인가. 금융권에 내재한 보편적인 편견은 아니었을까. 증권사 서류전형에는 키와 몸무게, 나이와 혈액형. 부모 형제의 직업, 학벌까지 묻는 구습이 남아있다. 구태라는 지적을 들어도 수년째 바뀌지 않는 부분이다. 이렇게 캐물어야 입맛에 맞는 스펙의 지원자를 골라내기 쉬워서 일게다. 

가난이 죄라는 그 증권사를 위한 ‘조언’을 전한다. 훌륭한 능력과 인성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고 싶다면, 면접관도 그러한 사람을 내보내길 당부한다. 

지영의 기자 ysyu1015@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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