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네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네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3-22 17:44:59

합살루는 그리 크지 않은 합살루 만을 방파제처럼 가로지르는 2개의 반도가 바다를 향해 쭉 뻗어있는 독특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첫 일정으로 구경한 합살루 성은 두 반도의 뿌리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졌다. 2시가 다 된 만큼 식사를 먼저 했다. 합살루 성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헤르만이라는 식당이었는데, 무얼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는 합살루 성 구경에 나섰는데 건물 사이를 지나더니 바로 성안으로 들어선다.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니 작은 골이 있고 건너편 언덕에 무너져가는 성벽이다. 그리고 보면 합살루 성은 그리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원뿔 모양의 지붕을 얹은 둥근 탑이 붙어있는 집은 벽만 남았다. 이 집을 돌아가면 정면에 펼쳐진 커다란 정원이 나온다. 정원 한 쪽에 성의 정문이 있다. 정문 안으로는 언제쯤인가 보수를 한 듯 시멘트가 덕지덕지 덧칠돼있다. 잘못된 복원은 하지 않음만 못하다는 증거가 될 듯하다.

합살루 성공회 성(Haapsalu piiskopilinnus), 간단하게는 주교의 성(piiskopilinnus)이라고 부르는 합살루 성(Haapsalu linnus)은 13~17세기에 걸쳐 요새로 사용됐다. 1228년 리가의 대주교 알베르트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영토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라네마(Läänemaa)와 발트해에 있는 2개의 섬, 사아레마(Saaremaa) 그리고 히요마(Hiiumaa)를 묶어 외셀-비크(Ösel-Wiek) 교구를 새로 만들고, 리가에서 가까운 다우가브리가(Daugavgrīva)의 시스테르시안(Cistercian) 수도회(베네딕토 수도회의 지파)의 고트프리드(Gottfried)를 주교로 임명했다.

외셀-비크(Ösel-Wiek)의 주교는 리훌라(Lihula) 성에 살았다. 주교는 기사단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페로나(옛 패르누)로 이주했다. 1263년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페로나를 불태우고 합살루에 대성당과 주교성을 지었다. 주교성은 대성당과 비슷한 시기에 완성되었다. 8m높이 성벽을 둥그렇게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가 1300년 무렵에는 15m높이의 성벽을 육면체의 형태로 쌓아 요새를 보강했다. 

14세기 무렵에도 요새는 보완이 이어져 2개의 직사각형 탑을 성 북쪽에 세웠다. 15세기 무렵에는 요새의 성벽이 탑의 벽과 거의 같은 높이로 올려졌다. 서쪽에 29m높이의 직사각형 망루를 세웠다. 리보니아 전쟁 중에 성벽 안쪽으로 해자를 건설했다. 17세기 스웨덴 통치기간 중에 성은 더 이상 방어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1710년 북방 전쟁 이후 합살루가 스웨덴에서 러시아제국으로 양도된 이후, 페테르 1세의 명에 따라 성벽의 일부를 철거하면서 폐허가 됐다. 

합살루 대성당은 1250~1260년 사이에 지었다. 425m² 넓이의 대성당에는 15.5m 높이의 돔을 세웠는데, 북유럽과 발트연안 국가에서 가장 큰 단일 교회의 하나였다. 교회는 교구의 수호성인 성 요한에게 봉헌됐다. 합살루 대성당에 대한 기록은 합살루를 세운 헤르만 1세 주교가 쓴 합살루 헌장에 처음 등장한다. 리보니아 전쟁(1558~1583년)이 끝나고 에스토니아가 루터교를 신봉하는 스웨덴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합살루 대성당은 가톨릭 돔 성당에서 루터교 소속의 성 교회(城 敎會)로 바뀌었다.

1625년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스(Gustavus Adolphus)는 성과 인근 마을을 야곱 드 라 가디( Jacob De la Gardie) 백작에게 팔았다. 백작은 낡은 요새를 현대적인 성으로 바꿨다. 교회는 1688년 3월 23일 일어난 화재로 구리 지붕이 피해를 입었으며, 1726년에는 폭풍으로 교회 지붕이 날아갔다. 1886~1889년 사이에 복원이 이뤄졌는데, 이 때 로마네스크 양식의 정면이 의사고딕 양식의 계단모양으로 변경됐다. 교회는 니콜라스 성인에게 봉헌됐다. 

1940년 소련이 합살루를 점령하면서 교회가 폐쇄됐다. 1944년 봄에는 부랑자가 침입해 오르간, 의자, 창문 등 제단에 있는 기물들을 파괴했다. 교회는 한동안 곡물창고로 사용되는 등 방치됐다. 1971년에는 대성당을 복원해 연주회장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수립됐지만, 에스토니아 공화국이 독립하면서 교회를 복원해 사용하게 됐다. 

첫 번째 예배는 1990년 성탄절에 열렸고, 교회는 다시 니콜라스 성인에게 헌정됐다. 1992년 어머니의 날에는 소비에트의 점령기간 동안 사망한 에스토니아 인 어머니를 기념하는 어머니의 제단이 봉헌됐다. 제단에 봉헌된 ‘성모자 상’은 조각가 힐레 팜(Hille Palm)의 작품이다. 

합살루 성에는 ‘백의 처녀(Valge Daam)’, ‘취한 황소(Joobnud härg)’, ‘아버지의 살인자(Isatapja)’, ‘검은 개(Must koer)’ 등 여러 전설이 내려온다. 8월에 보름달이 뜨면 예배당의 내벽에 흰 옷을 입은 소녀의 상이 떠오른다는‘백의 처녀(Valge Daam)’ 전설은 젊은 사제와 젊은 여성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외셀-비크의 주교가 관장하던 시기, 수도원의 사제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순결하게 살아야했다. 또한 주교의 성은 금녀의 공간으로 이를 어기는 경우 죽음으로 처벌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사제가 외출에서 만난 에스토니아 소녀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그녀를 주교의 성으로 끌어들이게 됐다. 소녀를 소년으로 변장시켜 성가대의 일원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을 오래가지 못했다. 소문을 듣게 된 주교는 성가대에 숨어있는 소녀를 찾아냈다. 이어 열린 평의회에서는 소녀를 건축 중인 예배당의 벽에 가두고 사제는 감옥에서 가두기로 했다. 불행한 소녀에게는 빵 한 조각과 물 한 잔을 건넨 것이 고작이었다.

급기야 금세 완성된 예배당의 벽으로 인해 소녀가 구원을 요청하는 애절한 목소리가 잠시 이어지다가 끊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뒤부터 8월의 보름달이 뜰 때 창밖에서 예배당을 들여다보면 흰옷을 입은 소녀의 그림자가 벽에 나타난다고 했다. 매년 8월 마지막 주에는 ‘백의 처녀(Valge Daam)’전설을 기리는 축제, ‘백의 처녀의 시간(Valge Daami aeg)’이 열리게 된 배경이다. 1979년 파울 킬가스(Paul Kilgas)가 노랫말을 짓고 게나디 타니엘(Gennady Taniel)이 곡을 쓴 뮤지컬이 초연됐고, 합살루 성의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다. 

합살루 성 구경이 끝나고서 버스를 타고는 합살루의 서쪽 끝에 있는 철도 및 통신 박물관(Raudtee- ja Sidemuuseum)으로 이동했다. 밖에서 보아 건물이 꽤나 길어서 카메라 렌즈 안에 담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단층 건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긴 기차역 건물을 처음 보는 것 같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승강장으로 들어가 보니 이유를 알 듯하다. 승강장 역시 엄청 길었다. 객차를 많이 단 기차가 운행이 됐는지가 궁금했다.

1903~1905년 사이에 지은 합살루 기차역은 해변 휴양도시로 건설된 합살루를 찾는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지은 것이다. 기차역의 규모만 보아도 당시 합살루를 찾던 휴양객들이 엄청났을 것 같다. 박물관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비정상적으로 긴 지붕 플랫폼과 왕실 파빌리온으로 오래된 역’이라고 소개한 것을 보면 당시 합살루 역의 분위기를 알 듯하다.

선로 위에 놓여있는 증기기관차들과 역사(驛舍)의 일부를 활용해 만든 통신박물관에서 에스토니아의 철로와 통신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1970년 6월에 개설된 이 박물관은 에스토니아 철도 100주년을 기념해 1970년에 탈린의 발트 역에 개설된 철도박물관과 연계돼있다.

기다란 승강장을 구경하다 보니 타르투에서 패르누로 가는 동안 김영만 가이드가 가져와 보여준 영화 ‘나의 펜싱 선생님(The fencer)’ 마지막 장면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핀란드 출신 클라우스(Klaus Härö)의 2015년작으로, 에스토니아 출신의 펜싱 선수이자 감독인 엔델 넬리스(Endel Nelis)의 실화가 바탕이다. 영화는 핀란드, 독일, 에스토니아 등 3국이 공동 제작했으며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영화로 선정됐다.

에스토니아 출신 펜싱선수인 엔델은 러시아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해서 레닌그라드에서 합살루에 오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에스토니아를 점령한 나치 독일의 징집령에 따라 독일군으로 복무했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색출해 강제수용소로 보냈기 때문이다. 합살루에 온 엔델은 체육교사로 일을 시작하고, 교장선생은 엔델에게 방과후 스키교실을 개설해달라고 한다. 장비도 없고 시설도 열악한 상황에 난감하던 엔델이 체육관에서 펜싱훈련을 하는 모습을 본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관심을 보이자, 펜싱교실을 열기로 한다.

교장은 펜싱이 반사회주의적 운동이라고 폐강을 강요하지만 학부모들이 나서서 지속할 것을 요구하면서 위기를 넘긴다.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되어갈 무렵, 레닌그라드에서 학생 펜싱선수권대회가 열린다는 공문이 온다. 이에 엔델은 레닌그라드에 있는 친구로부터 비밀경찰이 자신을 바짝 뒤쫓고 있다는 연락을 받지만 대회에 출전키로 한다. 장비가 없어 다른 팀의 도움을 받아 시합을 이어간 끝에 결국은 결승에 오르지만, 비밀경찰에 덜미를 잡힌 엔델은 결승전에 감독으로 나서지 못한다. 어린 학생들의 꿈을 접을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했던 엔델의 선택은 감동이 아닐 수 없다.

합살루 역에서 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어려웠던 시절을 그린 영화를 회상하다보니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은 옛 분들이 겪었을 애환이 떠오른다. 역시 자유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3시 반에는 합살루 역을 출발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으로 향한다. 버스가 출발하자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탈린에 도착할 무렵 비가 멎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5시 무렵 탈린에 도착할 때는 빗줄기가 가늘어진데 만족해야 했다.

탈린은 발트해가 상트 페트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로 향해 좁아져 들어간 핀란드만의 입구에서 가까운 해안에 위치한다. 탈린에서 80㎞ 북쪽, 바다 건너에는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가 있고, 핀란드만 끝에 있는 상트 페트르부르크는 320㎞ 떨어져 있고, 라트비아 리가는 남쪽으로 300㎞, 스웨덴의 스톡홀름은 서쪽으로 380㎞ 떨어져 있다. 탈린은 역사적으로 이 네 도시와 밀접한 유대관계가 있다. 

2019년 기준 43만4562명이 살고 있는 에스토니아 최대의 도시다. 에스토니아의 수도이며 에스토니아의 주요 금융, 산업, 문화, 교육 및 연구의 중심이다. 공식 이름은 탈린(Tallinn)이나 한때 탈린나(Tallinna)라는 이름이 같이 쓰인 적도 있다. 탈린나는 탈린 항구라는 의미로, 덴마크 사람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타니-린(Taani-linn)’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타니-린은 라틴어로 덴마크 마을(Castrum Danorum)로 부른데서 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겨울성 혹은 겨울마을을 의미하는 ‘탈리-린나(tali-linna)’ 혹은 ‘집·농장, 성·마을’을 의미하는 ‘탈루-린나(talu-linna)’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전해진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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