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좌절하지 않을 힘,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쿡리뷰] 좌절하지 않을 힘,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좌절하지 않을 힘,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기사승인 2020-07-09 07:00:02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포스터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서울고법 형사20부(강영수·정문경·이재찬 부장판사)가 세계 최대의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한 손정우(24)씨의 미국 송환을 6일 불허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손씨는 이날 낮 12시50분쯤 곧바로 석방됐다. 손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2심은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같은 날 새벽에는 수행 비서에게 위력을 이용한 성폭행을 수차례 저지른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수감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모친상을 당해 일시석방됐다. 안 전 지사 모친의 빈소에는 여권 유력 정치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절망적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무너지지 않을 힘이 필요한 시기. 8일 개봉한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감독 제이 로치, 이하 밤쉘)은 투쟁할 근력이 필요한 지금의 여성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남성 권력에 맞서 세상을 바꾼 세 여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2016년 미국의 보수언론 폭스뉴스의 로저 에일스 회장이 여성 앵커 그레천 칼슨을 상습적으로 성희롱한 혐의로 피소된 사건을 극화한 작품으로, 배우 니콜 키드먼이 그레천 칼슨을 연기했다. 또 다른 성희롱 피해자이자 폭스뉴스 간판 앵커인 메긴 켈리는 샤를리즈 테론이, 세 주인공 중 유일한 가상 인물인 케일라 포스피실은 마고 로비가 맡았다.

한때 잘나가는 앵커였던 메긴 켈리는 시사 프로그램 진행 중 자신에게 모욕을 준 남성 패널들에게 맞섰다가 좌천당하고, 심지어 밀려난 자리마저 얼마 못 가 빼앗긴다. 그가 로저 에일스를 고소하자 ‘보복성 소송’이라는 여론에 힘이 실린다. 메긴 켈리는 폭스뉴스의 다른 피해자들이 함께 나설 것이라고 믿지만 폭스뉴스의 감시 아래 있는 여성 직원들은 로저 에일스를 옹호할 것을 조용히 강요받는다. 한편 메긴 켈리는 고민에 빠진다. 그 또한 과거 로저 에일스에게 성희롱당한 경험이 있지만, 로저 에일스 덕분에 폭스뉴스의 간판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스틸
‘밤쉘’은 남성 권력이 여성의 야망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또 어떻게 여성의 입을 막는지 보여준다. 로저 에일스는 “TV는 시각매체”라며 여성 앵커들에게 신체 노출을 강요한다. 성공을 열망하는 여성들은 로저 에일스의 가스라이팅(심리지배) 아래 자신이 짧은 치마를 ‘선택’했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성범죄를 당하고도 당시 자신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등을 스스로 검열하며 위축된다. 기득권으로 불리는 메긴 켈리는 성희롱 피해를 고백함으로써 자신이 피해자로 ‘낙인’찍힐 것을 걱정한다. “이걸(성희롱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건, 여기에서 제일 약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야.” 로저 에일스를 고소할지 고민하는 메긴 켈리에게 그의 남성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네가 여기에서 가장 예쁘다는 뜻이야.”

케일라 포스피실은 직장 내 성범죄 문제가 과거에 종결된 일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문제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인물이다. 새로운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그는 로저 에일스와 독대할 기회를 잡지만 이 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한다. 다만 이 장면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질 여지는 있다. 케일라 포스피실의 신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남성적이라고 보는 관객도 있을 수 있겠지만, 거꾸로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무력감과 불쾌감이 로저 에일스의 부패한 도덕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그레천 칼슨과 메긴 켈리가 로저 에일스를 고소한 사건은 ‘미투’(Me too) 운동을 촉발했다고 평가받는다. ‘나 역시 성범죄 피해 경험이 있다’는 여성들의 외침은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탓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기 어려웠던 여성들의 용기와 연대를 보여주는 동시에, 성범죄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여성혐오적인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얘기한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여성들을 좌절시키는 사건은 여전히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쳐 나동그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시민들은 법원 앞에 모여 손씨의 송환 불허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안 전 지사의 성폭행을 고발한 김지은씨의 투쟁기 ‘김지은입니다’는 주요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재진입했다. ‘밤쉘’ 속 켈리의 마지막 대사처럼,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wild37@kukinews.com / 사진=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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