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의 원교와 추사

[고창에서 석 달 살기] 선운사의 원교와 추사

고창의 은퇴자공동체마을 입주자 여행기 (4)

기사승인 2020-10-10 00:00:29
꽃무릇이 속절없이 우르르 지고 난 후 선운사에 들어서서 다른 꽃을 살피다가 차꽃을 만났다. 꽃술이 동백꽃과 닮았다. 은은한 향기가 맑다. 
9월 중순부터 불붙기 시작했던 선운사 꽃무릇의 붉은 꽃이 추석 연휴가 지나며 사위었다. 이제 11월 말 단풍철까지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무엇을 볼까 궁금하겠지만, 선운산 골째기에는 언제 와도 볼 것과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무엇을 보려 하지 않고 도솔암까지 이어지는 시냇물 가를 천천히 걷기만 해도 부족함이 없다.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 근처 풀밭에서 뜻밖의 식물을 만났다. 제주의 습기 많은 오름과 숲에서 자주 보았던 고사리삼이다. 포자주머니를 달고 있는 포자잎이 백제왕관을 닮았다.
십여 년 전 우연히 단체 여행으로 갔던 강진 백련사에서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처음 보았다. 해남 대흥사에서도 그의 글씨를 보았고 구례 천은사에서도 보았다. 고창의 선운사엔 미당의 시와 동백꽃을 보러왔다가 원교의 글씨를 보았고 김제 금산사에서도 그의 글씨를 보았다. 전라도의 이름난 절집 어디에 가든 원교의 글씨 하나쯤은 있다. 

절집에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이 일주문이라면 두 번째 문은 천왕문이다. 엄숙해진 마음으로 이 문을 지나면 비로소 절집 마당에 들어선다.
선운사의 원교 글씨는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천왕문’ 세 글자를 바라보다 문을 들어서니 사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본다. 마음을 다잡고 절집 마당에 들어선다.

선운사 천왕문의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똑같은 글씨가 김제의 금산사와 영광의 불갑사에도 있는데 복제품이다. 그 아래의 ‘禪雲寺 선운사’ 현판을 쓴 이는 거암 김봉관인데 전북 진안 출신이며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고 후에 경찰서장으로 재직했던 이력이 알려져 있다. 지금은 원광대학교의 효봉 여태명 교수가 쓴 현판으로 바뀌었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사람들은 동국진체 (東國眞體)라 부른다. 한마디로 하면 조선 고유의 서체다. 이 서풍은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1723)에서 시작되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에게 전해졌고,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을 거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靜窩 정와’ 역시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고요한 움막’이라는 뜻이다.
생전 그의 글씨를 원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 날을 잡아 글씨를 써주곤 했다고 한다. 이날이 되면 그의 글씨를 받기 위한 비단이나 종이를 들고 온 사람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고. 당대에 그의 글씨는 조선 최고였다. 그러니 남쪽 바닷가 신지도에서 직선거리로도 120 km나 떨어진 이곳 선운사에서도 그의 글씨를 받기 위해 꽤 공을 들였을 듯하다. 

위는 해남 대흥사의 大雄寶殿 대웅보전 현판이고 아래는 강진 만덕산의 백련사에 있는 현판이다. 만년에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에게 원교의 글씨를 떼어내게 하고 자신이 써준 글씨를 걸게 했다고 한다.
살아서 조선 최고의 글씨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조상은 조선의 2대 임금이었던 정종에까지 이른다. 그의 집안은 정승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권력 싸움에서 밀리며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그는 갖 스무 살을 넘기며 세상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강화도에 들어가 30년을 살았다. 

추사가 원교의 글씨를 떼어내라 하고 대흥사에 써준 현판 ‘无量壽閣 무량수각’은 획이 살찌고 윤기가 흐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나이 51세이던 1755년(영조 29년)엔 나주 괘서사건 (영조 제거 역모)에 연루되면서 야인의 생활도 끝이 났다. 죄인이 되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지금의 함경도 회령에 유배되어 7년을 지냈다. 그리곤 다시 완도 옆의 신지도로 옮겨져 정조가 즉위한 첫해인 1777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30여 년, 나라의 북쪽 끝과 남쪽 끝에 유배되어 23년을 살았다. 

추사가 유배에서 돌아온 뒤 예산의 화암사에 써준 또 다른 ‘无量壽閣 무량수각’ 현판이다. 해남 대흥사의 현판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글씨가 달라진 추사의 생각을 반영하는 듯하다.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60세 때에 그는 평생 매달린 서예이론을 정리해 서결(書訣) 전편을 썼고 4년 후 서결(書訣) 후편을 써서 남겼다. 그러나 원교가 세상을 떠나고 9년 뒤인 1786년 태어난 추사는 후에 서원교필결후 (書員嶠筆訣後)라는 저술을 통해 ‘붓 잡을 줄도 모르고, 먹 쓸 줄도 모르면서 허명만 떨친 사람’이라고 원교를 비판했다. 추사는 또 만년에 그 자신 권력투쟁의 희생자가 되어 제주 유배 가던 중 해남 대흥사에 들러 거기 걸려있던 원교의 글씨를 떼어내게 하고 새로 써준 현판으로 바꾸어 달도록 함으로써 다시 원교의 글씨를 평가절하했다.

선운사 천왕문에서 원교의 글씨를 보고 마당에 들어서면 가운데 커다란 건물이 단연 눈에 띈다. 만세루다. 웅장하지만 소박하게 보이는 건물 안쪽의 지붕을 올려다보면 그 소박함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지붕의 서까래는 이리 휘고 저리 휘었고 기둥은 이어붙여 바로 세웠으며 그나마 어느 기둥은 휜 나무를 그대로 썼다. 쓰고 남은 목재를 이용해 만세루를 지었다고 하는 이유다.
당대에는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글씨’라는 극찬을 받은 원교의 글씨였지만 추사의 시대에는 ‘붓 잡을 줄도 모르고, 먹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 쓴 글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제주 유배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이제 보니 괜찮다’며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추사는 원교에 대해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선운사에서 나오며 부도밭에 들렀더니 추사가 쓴 백파율사비를 탁본 중이었다. 비바람에 더 훼손되기 전에 원형에 가까운 글씨를 보존하기 위한 국가 사업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비석 표면에 한지를 붙이는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운산 골째기에서 원교는 천왕문에, 추사는 부도밭의  백파율사 옆에 서 있다. 두 사람이 추구했던 서예의 지향점은 같았으나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길이 서로 달랐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글씨를 남겼다.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
전혜선 기자
jes5932@kukinews.com
전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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