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정진용 기자 = 직급을 빼고 영어 이름으로 부르는 사내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 내부 전산망에는 영어 닉네임을 그룹 포털에 등록한 뒤 사용하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사측은 공지글을 통해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전문가로 인정받는 수평적 기업문화의 첫 출발은 서로 영어 닉네임으로 부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카오, SK텔레콤 등 대기업뿐 아니라 신생 스타트업에서도 영어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서로를 호칭할 때 ‘대리’ ‘과장’ 등 직급 없이 영어 이름만으로 부르는 식이다. 직급과 서열이 주는 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의사소통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외부에 수평적인 기업 문화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난데없이 영어 이름을 지어야 하는 직장인들이 적절한 이름을 추천해달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글은 온라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인’에는 “이직하게 된 회사에서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어떤 이름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하고 있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나이대와 맞는지 조언이 필요하다” 등의 글이 있다.
영어 이름을 사용 중인 직장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10년차 IT계열 직장인 강모(34)씨는 “직급을 붙이고 안 붙이고가 생각보다 차이가 크다. 이름만 부르는 것만으로도 위계적인 느낌이 덜하다”면서 “영어 이름을 외우는 게 일이기는 하다. 또 조직의 평균 연령대가 높은 편이라면 거부감 때문에 적응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핀테크 업체 직장인 김모(29·여)씨는 “소통이 자유롭고 바로 위의 상사와도 평등한 기분이 든다”면서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직급이 높은 구성원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상명하복과 집단주의적 직장 문화는 직장내 괴롭힘의 근본적 원인이다.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1년이 넘었지만 직장내 괴롭힘은 줄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가 지난 7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겪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45.4%(454명)에 달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직전인 지난해 조사(44.5%)보다 0.9%포인트 높은 수치다.
일단 시행은 했지만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직장인의 공감을 산 장류진 소설가의 데뷔작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에서는 회사 대표가 수평적으로 소통하자며 영어 이름 사용을 의무화했지만 자신에게는 깍듯한 존댓말을 요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직원과 상사 사이에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의 식의 대화가 오간다.
익명을 요구한 한 조직 문화 관련 전문가는 “수직적인 조직 문화를 바꾸기 위해 기업들은 오랫동안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대부분 미국 기업에서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영어 이름 부르기는 그 중 하나의 외형적인 요소일 뿐이다. 조직 내 권한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도 당연히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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