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 운곡저수지가 가꾼 오베이골의 람사르 운곡습지

[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 운곡저수지가 가꾼 오베이골의 람사르 운곡습지

고창의 은퇴자공동체마을 입주자 여행기 (9)

기사승인 2020-11-14 00:00:59
운곡댐은 1983년 준공되었다. 남서쪽으로 20여 킬로미터 거리의 영광원자력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운곡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이 계곡 안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고창은 산도 많고 들이 넓은 고장이다. 산의 골짜기마다 저수지가 하나쯤은 있으니 그 넓은 들에서 사람들은 가뭄을 거의 모르고 농사를 지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운곡리 사람들도 그랬다. 저수지는 없었지만, 고목이 되어가는 참나무가 가득한 골짜기에서 사철 물이 흘러내렸고 겹겹이 둘러선 산이 험한 바람까지 막아주니 살기에 이만큼 아늑한 곳도 드물었다.

현재의 고창읍 죽림리 고창고인돌공원에서 운곡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매산재다. 고인돌을 살피며 매산재를 넘으면 오베이골이다. 고개가 다섯 방향으로 나 있어 오방골인데 지역 주민들이 사투리가 섞여 오베이골이라 불렀다. 
물이 풍부하고 오염원도 없는 이 골짜기는 아침과 저녁이면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운곡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 깨끗하고 풍부한 물 때문에 사람들은 대대로 살아오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고인돌공원 방향에서 매산재를 넘어가 울창한 숲길을 잠시 걷다가 운곡습지 탐방로 입구에 서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숲속으로 난 좁은 길을 만난다. 습지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설치한 탐방로다.

오베이골에 살던 사람들 역시 1980년 대 초에 떠나자 골짜기에서 물이 사철마르지 않고 흐르니 온갖 나무와 덩굴이 거침없이 자라며 사람들의 흔적을 지운다. 멀리 보이는 미루나무를 보고 옛날엔 저기 어디에 길이 있었겠거니 생각한다.
1981년 영광의 원자력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곳에 저수용 댐이 건설되면서 운곡리 일대가 둘레 10km의 저수지 속으로 사라졌다. 운곡저수지 건설과 함께 운곡리와 용계리에서 158세대가 고향을 떠났다. 원전 냉각수의 수질 관리를 위해 운곡저수지 전체에 철조망까지 설치되니 이 산골에 인적이 끊겼다.

탐방로에서 시누대 숲을 만나면 어느 집의 울타리 흔적이다. 걸으며 숲 속을 자세히 살피면 아직 남아 있는 시멘트 벽돌담이 보인다. 그 틈으로 이끼가 스며들고 덩굴이 넘다가 뿌리를 내리다가 언젠가는 벽돌마저 무너져 내리면 이 근처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으로는 시누대가 유일하게 남을 것이다.
고창고인돌공원의 중앙부에 산을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운곡리에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에는 매산재라 불렸다. 운곡리에서 닥나무를 재배해 만든 한지를 지고 고창읍내에 내다 팔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다. 이 매산재를 넘으면 오베이골이다. 이곳은 다섯 방향으로 난 고개를 넘어 아산, 부안, 고창 등으로 나갈 수 있어 오방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역 주민들이 사투리로 오베이골이라 부르던 곳이다.

2015년 초여름 매산재를 넘어와 탐방로를 걷다가 문득 작은 연못을 만났다. 물위에 잎을 띄우고 사는 식물들 사이로 노랑어리연이 보였다. 5년이 지나고 다시 찾아와 보니 머지 않아 연못도 흔적만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도 떠나고 한지를 뜨던 사람들도 떠난 후 30년이 지나면서 오베이골은 천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사람의 발길이 끊기자 논과 밭은 물론 집 자리까지 나무와 풀이 거침없이 자라났다. 그 나무와 풀에 곤충이 모여들고 새와 땅 위를 뛰는 짐승도 모여들었다. 그렇게 나무, 풀, 곤충, 새, 짐승이 오베이골의 주인이 되어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지우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운곡습지 탐방로를 걷는 동안엔 숲이 바람마저 잠재워 잠시 내가 살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가깝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다가 그 새소리조차 나를 경계하는 소리임을 알게 되면 이곳 운곡습지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깨닫고 그곳을 나선다. 걷기가 힘에 부치지 않으면 이곳을 나서 운곡서원까지 저수지 풍경을 즐기며 걸을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되돌아가면 된다.

오베이골의 운곡습지를 벗어나도 여전히 좌우의 숲은 울창하다. 왼쪽은 습지의 연장으로 버드나무와 온갖 덩굴이 무성하고 오른쪽은 산 풍경이 이어진다. 더 가면 고창군에서 조성 중인 습지 공원을 만난다. 아직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지만, 가까이에서 습지를 보며 그곳에 사는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2011년 조사에서 멸종위기 동물, 천연기념물, 보호식물 6종이 확인되었다. 이를 포함해 식물 459종, 포유류 11종, 조류 48종, 곤충 22종, 양서·파충류 9종 등 동식물 549종의 서식이 확인되었다. 환경부는 2011년 3월 14일 오베이골 일대를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고 이어 람사르 습지에 등록했다. 2년 뒤 2013년 조사에서는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이 327종 증가하여 총 864종으로 확인되었고 멸종위기야생생물은 3종이 늘어났다.

운곡저수지 안쪽 깊은 골짜기에는 차밭이 들어서고 있다.

운곡저수지 안 깊은 곳에 서원이 있다. 저수지를 둘러싼 산 중턱엔 저수지 건설 이전부터 있었거나 이장한 묘지들이 눈에 두드러지는데 서원은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다. 사당의 문에 걸린 현판 숭모문 (崇慕門)은 소설가 김동리의 글씨다. 예술원 회장 재임 중이었으니 1981년~1984년 어느 날 쓴 듯하다. 
이 람사르 운곡습지에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다만 이곳 식생에 대한 사람들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관찰로 전체를 나무 데크로 설치했다. 마주 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서로 지나가기조차 불편한 좁은 길이다. 

운곡저수지 풍경을 즐기며 계속 걸어 나가는 길은 잘 정돈된 포장도로다. 용계리의 고창 운곡 람사르습지 자연생태공원에서 운곡서원까지 저수지와 습지 탐방 열차가 이 길로 다닌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반 자동차는 다닐 수 없다.

운이 좋으면 운곡서원을 지나 용계리의 주차장을 향해 걷다가 운곡저수지가 연출하는 멋진 풍경에 붙들려 꽤 긴 시간 머물 수도 있다.
자세히 보면 멀리 보이는 미루나무가 줄 맞추어 높이 자랐고, 가끔 보이는 감나무와 시누대를 보고 이곳에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 있었고 집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시멘트 벽돌 담의 흔적이 얼핏 보이지만 이끼와 덩굴이 감싸며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마주하고 있는 호젓한 길을 지나면 뽕나무밭을 만나고 곧 주차장이다.

고창 운곡 람사르습지 자연생태공원 (고창군 아산면 운곡서원길 15) 역시 운곡저수지와 운곡습지를 관찰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이곳에서는 운곡서원까지 1시간마다 전기로 움직이는 탐방 열차를 운행한다. 왕복 1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으니 운곡저수지와 습지를 살피며 즐기기에는 걷기가 안성맞춤이다. 
나무와 풀의 잎이 무성한 계절에 찾아오면 탐방로에서 숲속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무와 덩굴들이 하늘마저 가릴 기세로 자라니 적당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외에는 바람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소리에 짐승은 숲속에서 숨죽이고 새들은 나뭇잎 뒤에 숨어 경계하는 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이 원시의 숲이 궁금해 찾아가지만 이젠 불시의 침입자일 뿐이다.

 바람 잔잔하고 맑은 날 아침 운곡저수지를 바라보면 이 저수지 안쪽이 ‘구름 골짜기’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다.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

전혜선 기자
jes5932@kukinews.com
전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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