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인세현 기자=과거 할리우드 콘텐츠의 히어로들은 하늘을 나는 능력이 필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활동의 주 무대가 달라지며 히어로의 자격이나 요건도 달라진 듯 보인다. 더는 ‘맨’이 아니어도 되고, 하늘을 날지 못해도 괜찮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한국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히어로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최근 인기를 끈 한국형 히어로물을 살펴보면 K히어로가 갖춰야 하는 것들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일단 이들의 모습은 매우 평범하다. 우리동네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다.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 중인 OCN 토일극 ‘경이로운 소문’은 한국형 히어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히어로인 카운터들은 평소 국숫집을 운영하며 국수를 팔다가, 악귀가 탐지되면 사냥에 나선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악귀를 잡기 위해 출동할 때 달리거나 자동차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달리기가 매우 빠르다는 설정이지만, 하늘을 날거나 공간을 이동하는 능력은 없다. 붉은색 트레이닝복과 교신용 이어폰을 착용하고 힘껏 달리는 이들의 모습은 히어로라기보다는 운동을 좋아하는 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를 구하는 과정과 히어로 세계의 구조도 현실적이다. 카운터들은 코마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는 조건으로 사후 세계인 융과 카운터 활동에 관해 계약했다. 주인공 소문(조병규)은 오래전 잃은 부모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에 카운터가 된다. 대의를 위해 히어로가 된 것이 아니라, 조건 앞에서 일종의 직무를 받아들인 셈이다. 계약 후 카운터들에게 생기는 것은 보통의 인간보다 조금 더 특출난 능력 정도다. 이를 원활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훈련도 거듭해야 한다. 능력은 반드시 악귀를 잡은 일에만 쓰여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인간사에 개입하는 것은 금지다. 카운터들은 인간사에 벌어지는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일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힘을 썼다가, 융으로 불려가 행동의 정당성을 추궁받기도 한다. 융인들 앞에 선 카운터들은 근로계약서에 사인한 회사원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정유미)도 평범한 모습의 히어로다. 역시 하늘을 나는 능력 같은 건 없다. 남들이 볼 수 없는 젤리를 보고 비비탄총과 장난감칼로 이를 퇴치하는 안은영은 고등학교의 보건교사로 일하며 학생들과 주변인들을 구한다. 하지만 안은영은 그 힘과 운명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홀로 보는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늘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갈 곳도 없다’는 안은영의 대사는 퇴마와 구원을 업으로 삼게 된 히어로의 외롭고 괴로운 속마음을 엿보게 한다.
이들과 맞서는 한국형 히어로물의 악과 악당 또한 매우 현실적인 부분에서 비롯된다.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와 맞닿아 있거나, 이로 인해 비롯된 욕망을 상징화해 나타난 것이 대다수다. ‘경이로운 소문’의 악귀는 본래 악한 마음을 지닌 이들을 찾아가 더 큰 악을 저지르고, ’보건교사 안은영’ 속 젤리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발현된 것이다. 악귀나 젤리보다 무서운 인간들도 있다. ‘경이로운 소문'의 정치인과 사업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민을 이용하고, ‘보건교사 안은영’의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용한다.
K히어로들은 악조건 속에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언제나 성실히 일해버리고 만다. 이들을 히어로 직에 묶어놓은 것은 계약이나 운명일지 모르지만,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형 히어로의 동력은 나의 옆 사람, 우리의 이웃에 관한 연민과 애정이며 책임감이다. 카운터들은 자격을 박탈당할 위험을 감수하며 동진시민을 위해 능력을 쓴다. 안은영이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건 딱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학생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고군분투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형 히어로물에서는 단 한 명의 초강력 히어로가 온 세상을 구하는 서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이 모여 조금이라도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가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4인의 카운터들은 저마다의 다른 능력으로 서로를 보완하며 적과 싸운다. 안은영은 한문선생 홍인표(남주혁), 학생들과 함께 연대해 위기에 맞선다. “다 날아가” 버릴 수 있는 바람을 맞고도 앞으로 나아간다. 손을 맞잡고 부둥켜안은 채 휩쓸려 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웃을 위해서다. 한국 시청자가 바라는 건 우리와 다른 히어로가 아니라, 이웃의 얼굴을 하고 우리동네를 힘껏 달리는 히어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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