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올해 꼭 봐야 할 한국영화가 나왔다. 한국영화는 제 몸도 감당하기 어려운 어른이 아이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가 지겹게 반복됐다. 그곳에 아이는 없고 어른의 이야기만 남았다. 영화 ‘아이’(감독 김현탁)는 이를 반복하지 않는다. 어른을 아이로 만들어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 아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걸 넘어 타인과 이해와 연대를 모색한다. 본 적 없는 길을 유려하게 헤쳐 가는 영화의 뒷모습이 따뜻하고 멋지다.
서로가 낯선 두 사람이 있다. 초보 엄마 영채(류현경)는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6개월 된 아이를 돌봐줄 베이비시터로 아동학과에 재학 중인 보호종료아동 아영(김향기)을 만난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 가까워질 수도, 가까워질 이유도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아이를 매개체로 서로를 존중하며 이해의 문을 열어놓지만, 한밤 중 일어난 사고의 책임 문제를 다투다 멀어진다. 당장 돈이 급한 두 사람 사이에 오해와 원망이 쌓이고 결국 극단으로 치닫는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이 함께 여러 사건을 겪으며 가까워지는 건 흔한 이야기다. ‘아이’는 어려운 길을 택한다. 초반부만 해도 가까워질 여지가 보였던 두 인물은 중반부에 들어서며 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넌다. 각자가 짊어진 현실의 무게가 지독하기 때문이다. 돌봐줄 누군가 없이 버텨온 이들에겐 어떤 위기도 혼자 극복하는 것이 익숙한 일이다. 살아가기 위해 상대를 찌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게 서로를 찌른 두 사람이 다시 화해와 이해의 길로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는 문제를 해결할 돌발적인 변수나 기지를 발휘한 해결책을 내놓는 대신, 인물에 더욱 집중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힘든 밑바닥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의 고된 삶을 전시해 동정하거나 응원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마치 공정한 심판처럼 그들의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행동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정도를 보여주며 끈질기게 지켜본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 놀랍고 당연한 결말로 이어진다. 반전처럼 벗겨지는 전개에 영화가 숨겨온 메시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힘을 들이지 않고 엄청난 힘을 뿜어내는 배우 김향기의 연기가 놀랍다. 류현경도 반대편 축에서 맹렬히 맞선다. 안정된 롱테이크로 담아낸 몇몇 장면은 배우들의 호흡과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대사와 표정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보다 배우들의 뒷모습으로 감정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지어낸 이야기를 진짜로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연기와 연출이 하나 된 순간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영화엔 목소리를 키우거나 제 역할을 하는 남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편견을 소재로 쓰지 않고, 모성의 힘을 특별히 강조하거나 당연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든 ‘잘’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스스로를 한계 짓지 않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반갑다. 당연하게도 재밌다.
오는 10일 개봉. 15세 관람가.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