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미나리’ 마음의 벽 허무는 솔직한 이야기의 힘

[쿡리뷰] ‘미나리’ 마음의 벽 허무는 솔직한 이야기의 힘

기사승인 2021-02-25 06:21:01
영화 '미나리'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사람의 온기로 가득하다. 영화의 배경인 미국 아칸소 트레일러에 내리쬐는 햇빛처럼 따스한 ‘미나리’(감독 정이삭)는 온 신경을 제이콥-모니카 가족에 집중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멀리서 지켜보거나 깊게 빠지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들려주는 이들 가족의 서사는 순식간에 관객의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 실제 감독이 미국에서 유년 시절 경험한 자전적인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한다.

‘미나리’는 미국 아칸소로 이주해 새로운 출발을 맞이한 한국인 가족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처음부터 모든 게 수월하진 않다. 이사하는 집이 트레일러인 줄 몰랐던 모니카(한예리)는 당황하지만, 자신만의 농장을 꿈꾸는 제이콥(스티븐 연)은 신이 나서 아이들에게 새 집과 넓은 잔디밭을 소개한다.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부부는 심장이 약한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김)을 돌봐줄 사람을 구하다 모니카의 엄마인 순자(윤여정)를 한국에서 부른다. 순자는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과 물품으로 가득한 가방을 열며 모니카와 눈물의 재회를 맞지만, 데이빗은 처음 본 할머니가 낯설어 자꾸만 뒤로 숨는다.

‘미나리’의 힘은 이야기와 인물들이 ‘진짜’처럼 보이는 데서 나온다. 한국인 출신 이민 1세대 주인공이 농장을 일궈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다는 설정을 제외하면, 영화에 특별한 사건이나 결핍은 드러나지 않는다. 특이한 인물이 존재하거나 누군가에게 이입하지도 않고, 여타 가족들과 다른 점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게 될 가족 내부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극적인 장치도 없이 스크린을 통해 있는 그대로 전달된다. 불순물을 제거한 솔직하고 순수한 정서는 ‘미나리’를 관객에게 쉽게 설득시키는 강력한 무기다. 잔잔한 이야기 안에 담긴 갈등과 희망, 즐거움과 눈물은 다른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가장 가족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렸다. ‘미나리’에는 주인공이나 빌런이 없다. 모든 등장인물이 동등한 위치에서 주인공처럼 움직이고 각자의 사정을 모두 이해시킨다. 누군가가 가족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성은 특히 진지하게 다뤄진다. 한 명이 아프거나 고집을 부리면 반드시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족이 모두 함께 움직이고 그곳에서 느낀 감정들을 공유하는 장면들은 ‘미나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또 가족을 가족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 갈등을 빚는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가족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대신, 긍정하고 끌어안는 관점의 이야기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진한 울림을 남길 만하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인의 손으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나리’를 보는 건 특별하다. 우리에겐 ‘미나리’에 등장하는 언어와 정서가 자연스럽다. 외국인들이 자막으로 볼 한국어 대사가 우리에겐 신뢰할 수 있는 기본 언어로 들린다. 오히려 영어 대사가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한국인 가족을 감싸는 한국적인 정서 역시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것이고, 인물들이 미국 문화에서 느끼는 생경함과 두려움이 예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미나리’는 언어와 국적이 어떻든 관계없는 영화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다르지 않게 살아내는 가족의 서사는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낄 이야기다. 놀랍고, 또 다행이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는 언어와 국적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 미국에서 각종 시상식을 휩쓸고 있는 배우 윤여정의 연기도 인상적이지만, 영화에 완전히 녹아든 한예리의 연기는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만하다. 인물의 정서를 충실히 표현한 스티븐 연도 눈에 띄고 한국어 발음 역시 많이 나아졌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인물을 연기하기엔 부족하다. 국적이 다른 배우들이 한국인 가족으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한국 관객만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광경이지 않을까.

12세 관람가. 다음달 3일 국내 개봉.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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