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암 환자에게, 진료실에서 못 다한 이야기

[진료실에서] 암 환자에게, 진료실에서 못 다한 이야기

글·건양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최종권 교수

기사승인 2021-03-24 05:05:02

진료실에서 암 환자 및 보호자를 만날 때에 차마 못 다한 이야기가 있다. 혈액종양내과 의사라면 누구나 암 환자에게 최고의 치료 혜택을 주고 싶지만 현실적인 벽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는데 그 벽은 제도적 벽일 수도 있고, 경제적 벽이기도 하다. 

치료제 자체의 효과를 생각하면 신약을 활용한 다양한 치료법이 있음에도, 제한적인 범위에서 치료 전략을 상담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필자의 환자 중 초등학생 자녀 2명을 둔 37세 여성이 전이성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도권 대형 병원에서 세포독성 항암제 등 여러 항암요법을 시행했음에도 치료 1년 만에 병이 악화돼 필자의 진료실을 방문했다. 유전자 분석 결과 현미부수체 불안전성(MSI-H)이 확인돼 면역항암제를 권유했지만, 환자는 고가의 치료비로 인해 결국 치료를 포기하고 말았다. 치료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할 수 없었던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수 십 년간 전이성 고형암의 표준 치료제는 세포독성 항암제였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투여하는 세포독성 항암제가 전이성 암환자들의 몸 속 수 십억 개의 암세포를 사멸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세포독성 항암제 투여의 목적은 완치보다 암의 진행을 최대한 늦춰 생존 기간을 연장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양한 연구들이 이뤄져 왔으며, 최근 몇 년 사이 ‘면역항암제’가 그 해답으로 떠올랐다. 인체의 면역 세포를 활용해 암 세포를 사멸하는 면역항암제의 작용 원리는 일본의 혼조 다스쿠 교수가 세계 최초로 발견해 201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이러한 원리를 활용해 여러 ‘면역항암제’가 나오고 있다.  

면역항암제는 환자의 몸 상태, 치료 상황 등을 고려해 단독요법뿐만 아니라 세포독성 항암제, 표적항암제와의 다양한 병용요법으로 처방되고 있으며, 적은 부작용과 높은 치료 반응으로 환자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모든 의약품은 적응증 이외의 투여에 대해서는 아무리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임의 비급여로 간주되므로 처방이 어렵다. 

물론 제도적으로 적응증 외 투약을 위한 사전승인, 사후승인제도가 있지만 기준이 매우 까다롭고 기각되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으로 처방은 어려운 상황이다. 의사의 처방권이 충분히 보장돼 허가 적응증 외 치료라 하더라도 합리적으로 판단될 경우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과 사뭇 대조적이다. 

국내 보건정책 특성상 전문의로서 안타까운 상황은 또 있다. 처방 현장에서 현실적인 치료 전략을 세울 때 경제적 여건도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항암제가 허가되고 급여 적용되더라도, 추가 적응증으로 급여가 확대되는 과정은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효과가 입증돼 허가를 받았더라도 보험 급여까지 이어지지 않는 치료제도 많다. 이때 전문의로서 고민은 시작된다. 치료제 자체의 효과를 생각하면 고가의 비급여 약제를 권하고 싶지만, 환자의 경제적인 여건을 알기란 쉽지 않아 혹시나 비용으로 인해 치료제를 쓸 수 없는 환자에게 헛된 희망만 주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필자의 병원에는 쓸 수 있는 치료법이 아주 제한적인 암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신약이 있어도 허가나 급여 전인 경우에 환자에게 권하기란 쉽지 않다. 최고의 치료를 선사해야 하는 의사가 절실한 암환자의 주머니 속사정을 먼저 묻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 진료실에서 차마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본다. 환자와 보호자가 전문의에게 먼저 보험급여 적용 여부와 관계없이 다양한 치료 옵션을 물어봐 주는 것도 최적의 치료 전략을 세우는데 필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에 더해 보험 여부 등 환자가 어느 정도의 치료 부담을 감내할 수 있는지 환자가 먼저 전문의에게 설명해준다면 빠르고 적합하게 실질적인 치료 전략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필자의 환자 중 종양이 림프선, 복막, 척추뼈 등으로 다발성 전이를 보였던 위암 환자가 있었는데, 마침 환자는 실손보험을 가입한 상태였고, 다행히 경제적 뒷받침이 가능해 면역항암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약 1년간의 치료 후 PET-CT 상 대부분의 병변이 사라져 환자는 완치 목적의 위암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면역치료를 유지하면서 건강하게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암 환자와 가족에게 진료시간은 너무나 짧아 1분 1초도 허투루 쓰기 어렵다. 소중한 진료시간, 환자와 보호자의 적극적인 치료 상담이 이뤄져 최적의 치료법이 환자에게 처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면역치료제/유전자 분석기반 표적치료제 등이 더 활발히 개발되고 제도적 개선도 병행되어 절망에 빠진 많은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빛이 확대되기를 기대해본다. 
조민규 기자
kioo@kukinews.com
조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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