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시장 커졌는데…학원 ‘갑질’에 속 앓는 작사가들

K팝 시장 커졌는데…학원 ‘갑질’에 속 앓는 작사가들

기사승인 2021-04-03 07:00:10
사진은 아래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픽사베이 제공.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신인 작사가 등용문 역할을 하는 작사 학원이 수강생에게 ‘갑질’을 한다는 폭로가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수강생 창작물을 수정·발매할 권한을 학원이 가져가면서, 수강생 다수가 작업에 따른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건을 공론화한 트위터 이용자 ‘익명의 케이팝 작사가 대리인’(이하 대리인)은 최근 쿠키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학원은 데모곡(가사를 붙이기 이전 시연 용도로 만든 곡)를 받을 수 있다는 권력을 바탕으로 수강생과 소속 작사가에게 ‘갑질’을 휘두를 수 있는 구조”라며 “작사가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주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원 수강은 작사가 지망생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데뷔 방식이다. 학원은 자사 교육 과정을 이수한 수강생에게 가요 기획사로부터 받은 데모곡에 작사할 기회를 준다. 수강생들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6개월간 매월 수강료 30~40만원을 지불해 작사 수업을 듣고 작업 기회를 받는다.

대리인은 이 과정에서 ▲학원이 수강생들 가사를 채택·조립해 기획사에 보내고 ▲누구의 가사가 얼마나 채택됐는지 수강생들에게 알리지 않으며 ▲기획사에서 받은 작사비를 수강생에게 지급하지 않거나 작사비가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자신이 쓴 표현이 가사에 들어갔는데도 크레딧에 올라가지 못하거나 ▲크레딧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작사가’가 오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익명의 케이팝 작사가 대리인’은 지난달 29일부터 1일까지 50여명에게 피해 제보를 받았다고 한다.
수강생 손에 쥐어지는 저작권료는 큰 폭으로 줄어든다. 학원은 퍼블리싱 계약으로 수강생 몫 저작권료의 20~40%를 가져가고, 일부 학원 원장은 수강생 창작물에 공동 작사 형태로 참여하면서 지분 일부를 차지하기도 한다. 수강생이 단독으로 작사할 기회를 얻더라도, 저작권료의 상당 부분은 회사 몫으로 책정된다고 대리인은 설명했다. 대리인에 따르면 유명한 가수들의 곡에 참여한 K팝 작사가 대부분 본업을 따로 갖고 있다. 작사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학원을 등진 채 활동하기는 어렵다. 우선 작사가 지망생에겐 학원 수강이 거의 유일한 데뷔 통로다. 가요계에 인맥이 없으면 자신의 창작물을 기획사에 선보일 방법이 없어서다. 수강 중인 학원 원장 눈 밖에 나면, 해당 수강생의 가사가 의도적으로 누락되거나 데모곡을 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작사가로 정식 데뷔한 후에도 학원에서 독립하긴 힘들다. 대리인은 “작사가가 되고 난 후엔 학원과 계약을 맺어 일한다. 계약이 끝나고 독립을 하고 싶어도 기획사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학원이 독점하고 있으므로 쉽지 않다. 이 경우 해당 학원의 강사로 일하며 작사를 겸한다”고 설명했다. 대리인이 받은 제보 가운데는 ‘회사에서 독립했다가 학원장이 현직에서 일하기 어렵도록 수를 써서 강제로 활동이 중단됐다’는 사례도 있었다. 기획사와 친밀한 학원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얘기다.

대리인이 지난달 29일 작사 학원의 ‘갑질’ 사태를 처음 폭로한 뒤, 작사가 및 학원 수강생 50여명이 사건 공론화에 힘을 보탰다. 대리인은 “실제 피해자는 이 숫자의 수십 배가 될 것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실명이 거론된 작사 학원 대표 A씨는 언론을 통해 의혹을 부인하며 대리인을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밝힌 상태. 대리인은 작사가 및 지망생, 변호사 등과 함께 대응할 계획이다. 수강생 사이에선 ‘특정 학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가사 저작권료 절반 이상을 학원 몫으로 배분하는 업체가 한둘이 아니라는 의미다.

대리인은 “K팝 시장이 커지면서 그만큼 많은 리소스가 필요하게 됐다. 기획사는 빠른 공급을 위해 리소스를 (작사 학원을 통해) 아웃소싱하기 시작했고, 기획사와 결탁하고 과정을 독점하는 학원이 생겨났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학원 측만 노력하는 게 아니라 기획사 측 역시 노력해야 한다”면서 “우리가 원하는 건, 학원 측이 착취의 선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며,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수강생과 작사가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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