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해외토픽에서나 볼 이야기다. 매년 12월31일만 되면 우산을 들고 벤치에 앉아 오지 않을 비를 기다리는 남자가 있다. 그것도 무려 8년 동안. ‘비와 당신의 이야기’(감독 조진모)는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이자,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설득해내는 영화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기다리는 이 남자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삼수생 영호(강하늘)가 잊고 있던 초등학교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엄마와 함께 오래된 책방을 운영하는 소희(천우희)는 아픈 언니 소연(이설)에게 온 편지를 읽고 대신 써주며 필담을 이어간다. 소연이 제시한 규칙은 세 가지. 질문하지 않는 것, 만나지 않는 것, 찾아오지 않는 것. 규칙을 깨고 연말에 만나자는 영호에게 소연은 ‘연말에 비가 내리면’이라는 불가능한 단서를 단다.
영화는 아름답고 순수한 감성을 그린 청춘 멜로 영화다. 안정된 현실보다는 불가능한 꿈을 좇고, 빠르고 정확해지는 디지털보다 따뜻하고 아련한 아날로그를 추구하는 인물들이 세계를 채운다. 영화 ‘건축학개론’, ‘유열의 음악앨범’이 그랬듯, 이 영화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설렘과 순수한 열기로 가득한 청춘의 단면을 보여준다. 스치는 인연과 작은 사건들이 하나 둘 쌓여 큰 울림을 일으키고 그것이 곧 이야기의 굴곡이 된다. 남녀의 만남 이후의 이야기 대신, 만남 이전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 차별점이다.
2003년과 2011년의 이야기지만, 시대를 그리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당시 유행했던 문화나 음악을 보여주는 쉬운 선택을 하지 않고, 오직 편지에 집중한다. 편지로 소통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마지막 시대에 인물들은 우산을 만들고 책을 판다. 영화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현실적이라고 우기지 않는다. 대신 어쩌면 어딘가에 존재했을지 모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식으로 접근한다. 서울의 영호와 부산의 소희가 각각 자신의 삶에 단단한 확신을 갖게 되고 천천히 성장하는 모습에 진정성이 묻어난다. 비현실적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몰입할 수 있었다면, 영화가 인물들의 일상적인 고민과 선택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꼭 첫사랑의 아우라에 기댄 이야기는 아니다. 영호와 소희는 로맨스에서 한 걸음 벗어난 위치에서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불안정한 삶에서 안정된 미래로 가야 한다고 믿었던 영호는 더욱 불안정한 미래를 향해 뛰어든다. 안정된 삶을 살고 있던 소희 역시 어머니에서 벗어나 독립의 길을 걷는다. 서로에게 조언하거나 직접 길을 열어준 결과가 아니다. 서로의 편지에서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본 덕분이다. 청춘을 주체적으로 그렸을 뿐 아니라, 따뜻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화법이 인상적이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언뜻 바보 같은 영호를 배우 강하늘이 연기했기에 설득력이 높아졌다. 천우희의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도 좋지만, 특별출연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강소라의 연기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극장을 나서며 슬쩍 ‘2011년 12월31일’의 날씨를 검색하게 하는 영화다.
오는 28일 개봉. 전체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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