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피해자는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서울 동작구 현충원을 참배하며 방명록에 적은 사과문 때문입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과가 때로는 더 큰 논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성폭력 사과문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피해자 호칭 똑바로…성폭력 가해 사실 인정하기①
“예기치 못한 일로 시정 공백이 생긴 것에 책임을 통감한다. 피해 호소 여성의 아픔에 위로를 표한다. 당을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2020년 7월13일,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 |
사과문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피해 사실에 대한 인정입니다. 지난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에서 민주당은 피해자를 ‘피해 호소 여성’ 또는 ‘피해호소인’으로 지칭했습니다. 사실상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과는 가해자로부터 고통받은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변명문 아닌 사과문…성폭력 가해 사실 인정하기②
“저는 한 사람에게 5분 과정의 짧은 면담에서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하였습니다” -2020년 4월23일 오거돈 당시 부산시장 “아마도 30여년 전 어느 출판사 송년회였던 것 같은데, 여러 문인들이 같이 있는 공개된 자리였다. 술 먹고 격려도 하느라 손목도 잡고 했던 것 같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오늘날에 비추어 희롱으로 규정된다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뉘우친다” -2018년 2월6일 고은 시인 |
가해 사실에 대한 인정도 사과문의 필수요소입니다. 피해자와 합의된 범위 내에서 어떠한 가해를 저질렀는지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일부 사과문에서는 가해 사실을 ‘불필요한 신체접촉’으로 축소했습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이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기도 합니다. 가해 사실에 대한 합리화로 비칠 수 있습니다.
◆국민·지지자에게 죄송?…사과의 대상은 피해자여야
“공인으로서 물의를 일으켜 국민여러분께 사죄드리며, 저를 그토록 아껴주신 지역주민들께도 용서를 빕니다” -2006년 3월20일 최연희 당시 무소속 의원(한나라당 탈당)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국민 여러분과 박근혜 대통령님께 거듭 용서를 빌며 머리 숙여 깊은 사죄드린다” -2013년 5월11일 윤창중 당시 청와대 대변인 |
사과의 대상은 피해자여야 합니다. 정치인의 경우, 사과문에서 국민과 지지자 등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데요. 이들에 대한 언급도 필요하지만,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야말로 믿어준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재발 방지 위한 개선 방안, 선택 아닌 필수
“저희 당 다른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제게 해주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2021년 3월17일 박영선 당시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
말뿐인 사과는 공허합니다. 성폭력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개선책도 함께 명시돼야 합니다. 개선책은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언제까지 개선 방안을 이행할 것인지 밝혀야 합니다. 가해자가 아닌 책임자로서 하는 사과일 경우,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징계가 사과문에 포함돼야 합니다. 피해자의 일상회복을 위한 내용도 함께 담겨야 하죠.
◆적절한 장소와 시기, 피해자에 대한 예의
“선열들이시여! 국민들이시여! 피해자님이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민심을 받들어 민생을 살피겠습니다” -2021년 4월22일, 서울 동작구 현충원 방명록, 윤호중 민주당 비대위원장 겸 원내대표 “그동안 저에게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 정말 부끄럽고 참담하다” -2018년 2월19일, 사전 연습 후 기자회견 진행, 이윤택 연출가 |
피해자와 전혀 관계없는 장소에서 사과를 외치는 것은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순국선열들이 묻힌 현충원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사과한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행동이었습니다. 연극계 후배들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수감된 이윤택 연출가는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기자회견 전 ‘연습’이 있었다는 폭로가 나왔습니다. 연습 과정에서 자신의 표정이 불쌍한지에 대해 확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면피성 사과였다는 지적입니다. SNS를 통한 일방적인 사과 또한 피해자와 합의가 없다면 부적절합니다.
◆ 사과했으니 모든 게 끝?…진정성 있는 태도 보여야
전문가들은 진정성 있는 사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박 전 시장 피해자 변호인단의 서혜진 변호사는 “(성폭력 가해자들은) 근본적인 사실관계나 자신의 가해 행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라며 “성폭력 피해자 중 ‘사과만 제대로 받았다면 고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그는 “일방적인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과를 수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노선이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는 “성폭력 사과문에는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가 전제돼야 한다. 어떤 것도 책임지려하지 않는 모호한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사과문의 내용뿐만 아니라 작성 과정, 태도, 재발 방지 이행 여부 등도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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