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압박감 [0.687]

화장,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압박감 [0.687]

기사승인 2021-12-31 06:05:09

[0.687]
글로벌 성 평등 지수 0.687. 156개국 중 102위. 2021년 한국은 완전한 평등에서 이만큼 멀어져 있다. 기울고 막힌 이곳에서도 여성은 쓴다. 자신만의 서사를.
파운데이션부터 마스카라까지, 꼬박 한 시간을 공들여 화장한다. 마스크에 화장이 뭉개질까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있다. 애지중지 유지한 화장은 퇴근 5분 만에 사라진다. 허무하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화장할 수밖에 없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화장하는 여성들이 있다. 잠을 덜 자더라도 화장은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20대‧50대 여성에게 들어봤다.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20대 여성 박모씨는 누구보다 맨얼굴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로션만 발라도 당당했다. 땀이 나면 언제든 찬물 세수를 했다. 여자 친구들이 모여 앉아 화장에 공을 들여도 관심 갖지 않았다. 안 해도 문제없이 살 수 있었다. 

그랬던 그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발단은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이었다. 사진관 주인은 그에게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설득했다. 면접관이 좋아할 만한 자연스러운 화장을 해주겠다고 했다. 박씨는 길었던 취업 준비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그게 첫 화장이었다. 입사 뒤 박씨는 회사 동료로부터 “예쁜 사원이 들어와서 잘 됐다”는 말을 들었다. 

회사생활을 한 지 반년이 넘었다. 출근 전 화장하기 위해 아침밥을 거르는 건 예삿일이 됐다. 회사 동료들은 박씨에게 친절하다. “오늘 특히 예쁜 것 같네”는 그가 자주 듣는 아침 인사다. 박씨는 화장한 모습으로 받았던 호감이 무너질까 조마조마하다. 상사는 종종 다른 팀 여성 직원 흉을 봤다. 예쁘지도 않으면서 화장도 안 하고 다닌다는 이유였다. “그 얼굴로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박씨는 그 말이 자신에게 향할까 봐 겁이 났다.  

이런 고충을 부모님을 비롯한 지인에게 털어놨다. 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아직 어려서 그래, 꾸밀 수 있을 때 실컷 해.”, “나중에 성공하면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래픽=이해영 디자이너
사회에서 성공했다 자부하는 중년의 커리어우먼도 화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50대 여성 신모씨는 대학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스타일리스트 전공으로 패션‧메이크업을 강의한다. 신씨는 방송국 분장실에서도 근무 한다. 주로 무대에 오르는 이들의 얼굴을 만진다.

신씨는 젊었을 때 화장하지 않았다. 호기심에 발라본 립스틱은 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다. 화장 안 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예쁜 나이에 화장을 안 하니 아깝다.”, “얼굴이라도 예뻐야 누가 데려가지.” 주변에서 신씨를 타박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지만, 압박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수라는 지위를 얻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업무 성과를 보여줘도 젊고 예뻐 보이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비슷한 경력의 중년 남성은 실력으로만 인정받았다. 성공을 위해서는 지성은 물론 미모까지 겸비해야 했다.

신씨의 외모는 생계와 직결돼 있다. 그가 맨얼굴로 수업한 날 한 수강생은 ‘인상이 너무 차갑다’는 후기를 남겼다. 무시할 수 없었다. 다음 학기 강의 계약이 흔들렸다. 업계에서는 나름 잔뼈가 굵다고 자부했다. 그에게 돌아온 건 실력 평가가 아니라 외모 지적이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그는 이제 매일 화장대 앞에 앉는다. 신씨는 물었다. “화장을 안 해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누가 맨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요.”

신민경 인턴기자 medsom@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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