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방지법, 누구를 구하나

N번방 방지법, 누구를 구하나

기사승인 2022-01-13 06:36:01

‘N번방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불완전하다. 사적 대화 검열과 실효성 부족한 규제가 법안의 발목을 잡고 있다.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법을 없애자는 목소리도 크다. 완벽하지 않은 법은 폐지해야 하는 것일까.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 법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들었다. 그들은 말한다. N번방 방지법은 오늘도 누군가를 살렸다. [편집자주]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책상 2개가 꽉 들어찬 좁은 사무실. 책꽂이에는 피해자 지원 기록을 모은 두툼한 파일이 빈틈없이 꽂혀있다. 모니터 옆에는 해바라기센터, 경찰서 여성청소년범죄수사과 등 연계기관 연락처를 적은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었다. 영천, 칠곡, 구미, 경산…. 경북 행정구역도 이젠 빠삭하다. 피해자 지원 요청이 오면 직접 운전해 찾아간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는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

“안녕하세요. 초등학생이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당했어요. 그 지역에 피해자가 상담받을 지원센터가 있을까요?” 목소리 주인공은 최금주(50·여) 경북 디지털 성범죄 특화상담소(이하 경북 상담소) 상담원.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공세연(43·여) 상담원은 전년도 운영·예산 실적 등 행정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두 사람이 상담소를 꾸린지 어느덧 2년이 됐다. 

디지털 성범죄 특화상담소는 전국에 10곳이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게 심층 상담, 삭제 지원, 수사‧법률‧의료 연계 및 치유회복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경북 상담소는 포항 남구에 있는 사단법인 포항여성회 건물 2층 사무실을 쓴다. 이곳에서 지난 7일 최 상담원과 공 상담원을 만났다. 
지난 7일 방문한 경북 포항 경북 디지털 성범죄 특화상담소. 모니터 옆에 경북도 지도가 붙어있다.    사진=정진용 기자

경찰 조사·재판 동행, 개별 상담, 불법 촬영물 삭제 지원 등. 지난 한 해 경북 상담소 지원 건수는 총 772건이다. 짧게는 전화 한 통에서부터 길게는 1년을 피해자와 함께한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고통을 간접적이나마 느끼고 있다. 

“완벽한 법이 어디 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법망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강력범죄 수준이지만 처벌은 훈방이나 벌금에 그칩니다.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사태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N번방 방지법은 웹하드 사업자와 일정 규모 이상 부가통신사업자에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 방지를 위한 기술·관리 조치를 의무화했다. 지난달 10일부터 시행했다. 유튜브·인스타그램·트위터·네이버·카카오 등 국내외 플랫폼 사업자와 각종 커뮤니티가 적용 대상이다.

지난 7일 방문한 경북 포항 경북 디지털 성범죄 특화상담소 내부 모습.   사진=정진용 기자

두 상담원 모두 N번방 방지법을 향한 우려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나 피해자가 고통받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법안 폐지를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유포된 영상은 완전 삭제가 불가능하다. 불법 촬영물 의심 영상을 사전에 확인·차단하는 예방 조치, 즉 N번방 방지법이 필요한 이유다.

불법 촬영물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공포는 시작된다. 영상은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내 영상을 볼지도 알 수 없다. 한 피해자는 작은 아버지로부터 피해 사실을 들었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될 수 있다. 가해자는 대부분 지인이다. 별 탈 없이 헤어진 전 남자친구 혹은 함께 웃고 떠들던 회사 동료들이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2020년 피해상담통계’에 따르면 피해경험자 연령별 통계는 20대가 38.3%로 가장 높았다. 20대를 대상으로 한 사이버 성폭력 가해자는 애인( 41.3%)이 제일 많았다.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전문위원회가 지난 6일 발표한 4차 권고안.

영상 촬영을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왜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 피해자는 끝없이 자신을 원망한다. 불안감, 무력감, 고독은 피해자를 벼랑 끝으로 몬다. 지난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불법 영상이 유포된 피해자 45.6%가 자살을 생각했고, 이 중 42.3%는 구체적인 자살 계획까지 세웠다. 19.2%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 반면 가해자는 80% 이상이 1심에서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국내 플랫폼에서도 디지털 성폭력은 일어난다. 시민단체 대전여민회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디지털 성폭력 실태를 모니터링한 결과 2200여건의 사례를 적발했다. 플랫폼 유형별로 트위터 1105건(50%), 유튜브 326건(15%), 디시인사이드 287건(13%), 일간베스트 170건(8%), 텀블러 135건(6%) 순이었다.

N번방 방지법을 더 일찍 시행했다면, 누군가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한 여중생은 SNS를 통해 만난 지인에게 협박을 받고 신체 사진을 전송했다. 사진이 퍼질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다. 인터넷 개인 방송을 하는 한 성인 여성은 도둑 촬영을 당했다. 누군가 유튜브 등 플랫폼 3곳에 영상을 퍼트렸다. 모두 지난해 경북 상담소에 접수된 구조 요청이다.

트위터 고객센터 신고란에 생긴 ‘한국법’ 카테고리. 

N번방 방지법은 변화를 가져왔을까. 지난달 21일 대전여민회의 모니터링 결과 발표에 따르면 N번방 방지법 시행 이후 트위터 고객센터 신고란에는 ‘한국법’이라는 별도 카테고리가 생겼다. 모니터링 참가자들은 신고 절차가 간소화되고 문제 게시물 삭제 처리 속도가 빨라지는 등 변화를 느꼈다고 평가했다. 대전여민회 관계자는 “국내 법이 바뀌면서 국제 플랫폼도 움직인 사례”라고 봤다.

전문가들은 N번방 방지법을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라고 본다. 김미토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운동기획팀장은 “검열 논란을 부추긴 ‘고양이 영상 차단’ 주장은 결국 사실이 아니었다. 틀린 근거를 대며 이제 첫발을 뗀 법안을 비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면서 “플랫폼 사업자가 불법 촬영물 연관 단어 검색을 차단하고, 유통되지 않게 감시하는 것은 디지털 성폭력을 막기 위한 기본 조치다. 이것도 하지 말자는 것은 손 놓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장임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다른 유형의 성폭력 피해자보다도 심각하다. 이런 피해를 막으려면 중요한 가치인 사생활에도 일부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무 자르듯 나뉘는 것이 아니다. 불법 촬영물 유포가 침해해서는 안 될 사적 영역이라는 논리는 마치 살인 사건도 개인 간 일어났으니 개입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상당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이어 “N번방 방지법에 반대하는 여론도 디지털 성범죄를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다. 개인의 인터넷 활동에 대한 과도한 규제를 경계하는 것”이라며 “인터넷 사업자가 사용자와 협의해 모니터링 기준을 만들고, 조율해 나가며 우려가 불식되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적절한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상담전화 ☎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 129, 생명의 전화 ☎ 1588-9191, 청소년 전화 ☎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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