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솔로지옥’의 부제는 ‘세상에서 가장 핫한 지옥’이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솔로지옥’은 공개 전 스킨십 수위가 높은 한국판 ‘투핫’으로 홍보되며 관심을 모았다. 신체적으로 건강하다 못해 화가 난 젊은 남녀들이 한여름 무인도에 모여서 무슨 일을 벌일까 기대하게 했다. 혹할 수밖에 없는 홍보에 알고도 속아주는 느낌으로 본편을 시청한 이들은 혀를 찼다. 성실하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출연진들은 아침마다 해변에 모여 운동을 한다. 단백질이 부족한 걸 아쉬워하며 건강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다.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한다. 당연하다는 듯 선의의 경쟁을 펼쳐서 특별한 갈등도 없다. 볼 뽀뽀를 넘어서는 핫한 장면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시청자들은 밀려오는 배신감을 토로하는 대신 다른 것에 주목했다. 기대하지 못한 재미가 있었다.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는 아슬아슬한 드라마는 자꾸만 다음 회차를 기다리게 했다. 제작진의 연출은 영리했다. 불필요한 개입을 최소화했고, 오직 출연진의 로맨스에 집중했다. 제작진은 이들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 사람인지 자랑하지 않는다. 과거 이력이 선택의 근거가 되도록 하지 않는다. 출연진의 감정이 얼마나 진실인지, 왜 가슴 아픈지 강조하지도 않는다.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가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는 이들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자극적인 데이팅 프로그램에 익숙한 외국 시청자들도 담백하고 깔끔한 한국형 로맨스에 빠졌다는 소문이 들린다.
어쩌다 이렇게 재밌어진 걸까. ‘솔로지옥’은 현실을 지우고 쇼를 만들었다. 먼저 무인도로 공간을 현실과 분리시켰다. 나이와 직업을 비밀로 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출연진은 무인도에서 펼쳐진 낯선 세계에 빠르게 적응했다. 나이를 모르니 서로 존대 없이 말을 편하게 하자 한국 문화 특유의 위아래 서열 문화가 사라졌다. 직업과 직장을 의식하지 않자, 배경이 아닌 사람 본연의 매력에 집중하게 됐다. 과거 이력을 신경 쓰지 않자,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재에 집중하게 됐다. 한국 사람들이 연애 상대를 고를 때 가장 의식하는 외적인 조건들은 외모 빼고 모두 사라졌다. 덕분에 ‘솔로지옥’은 그 어느 데이팅 예능 프로그램보다 쿨한 정서를 보여준다.
그동안 수많은 데이팅 프로그램이 리얼리티를 강조했다. 제작진들은 출연진이 사는 현실의 연장선에 프로그램을 설정했다. 그들의 목표는 출연자가 현실과 방송을 헷갈릴 정도로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이와 직업, 연애 경력 등 인물들의 과거는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시청자들은 마치 출연진을 잘 아는 사람처럼 과몰입한다. 출연진의 선택으로 그를 알아가는 대신,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다는 해석이 난무했다. 리얼리티는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에도 이어졌다. 시청자들은 방송 이후 실제 연애 여부와 그들의 삶을 SNS, 유튜브로 지켜본다. 사생활 침해부터 범죄에 가까운 비난 등 각종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솔로지옥’은 리얼리티가 쇼 안에서 이뤄지도록 했다. 지옥도와 천국도라는 낯선 세계를 만들어 현실과 거리를 뒀다. 그 안에서도 출연진이 진정성 있는 사랑을 하고 방송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마치 제한 조건이 분명한 게임 안에서도 충분한 자유도를 즐기는 것과 비슷하다. ‘솔로지옥’ 출연진 대부분은 SNS와 유튜브 등에서 활동하며 자신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데 익숙한 편이다. 많은 데이팅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한 학습효과 덕분인지 자신의 말과 행동이 방송에 어떻게 나갈지 정확하게 아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조심스럽게, 때로는 솔직하고 과감하게 행동한다. 시청자 역시 어느 정도 만들어진 상황이라는 걸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의 콘텐츠로 로맨스를 본다. 시종일관 눈에 보이는 허리에 찬 마이크, 어디든 출연진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모른척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솔로지옥’의 짧은 분량은 모든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제작진은 인터뷰에서 “로맨스를 중심으로 냉정하게 편집했다”고 밝혔다. 회당 약 1시간 분량의 8부작 데이팅 예능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드물다. 16부작 채널A ‘하트시그널 시즌3’ 마지막회는 1시간50분, 15부작 티빙 ‘환승연애’ 마지막회는 2시간10분 가까이 된다. 일반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가 방송 이후 대중에게 심한 비난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작진은 ‘방송은 방송일 뿐’이라며, ‘방송에 담기지 않은 모습이 훨씬 많다’며 자제를 당부한다. 방송과 현실이 다르다는 당연한 진실을 왜 몰랐냐는 것처럼 나무란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반인 출연자의 진짜 모습인 것처럼 긴 시간 동안 방송해 시청자의 과몰입을 유도한 건 누구일까.
‘솔로지옥’은 알고 보면 조금도 핫하지 않고, 지옥도에 남은 출연진도 행복한 순한맛 데이팅 프로그램이다. 현실을 조금 벗어나도, 분량이 길지 않아도, 출연진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지 않는다. 그럼에도 얼마든지 재밌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이제 과몰입이라는 진짜 지옥에서 빠져나올 시간이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