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 “목소리는 안 부러워요, 내 정체성이니까” [쿠키인터뷰]

장기하 “목소리는 안 부러워요, 내 정체성이니까”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2-02-25 06:00:19
싱어송라이터 장기하가 공개한 신곡 ‘부럽지가 않어’ 뮤직비디오 속 장면.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어둠 속에서 정장을 입은 사내가 주술에 걸린 듯 몸을 흐느적댄다. 진지한 표정으로 우스꽝스럽게 허우적대는 모습이 퍽 기묘하다. 기행의 주인공은 가수 장기하. 그는 지난 22일 발매한 솔로음반 타이틀곡 ‘부럽지가 않어’에서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라고 최면 걸듯 랩을 한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중략) 나는 부럽지가 않어”라는 패기에 온라인에선 ‘이상하게 자신감 생긴다’, ‘출퇴근길 정신 가다듬기 좋은 노래’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12년 전 ‘싸구려 커피’로 88만원 세대를 열광하게 했던 장기하식 냉소가 또 한 번 통했다.

“노래가 너무 비호감일까 살짝 걱정했는데, 일상에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23일 화상으로 만난 장기하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장기하가 노래에 맞춰 몸부림에 가까운 춤을 추는 뮤직비디오는 Z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송예환이 기획했다. 부럽지 않다고 말하지만 실은 부러워하는 대상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떠다니는 인물을 보여주려 했다고 소속사 측은 설명했다.

장기하.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명문대학교를 다니다가 데뷔 6개월여 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장기하게도 부러운 사람은 많다. “SNS 피드에 뜨는 거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요. 제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요. 나보다 팔로워가 많다든가, 노래를 더 잘한다든가, 돈이 더 많다든가, 뱃살이 없다든가, 더 잘생겼다든가…. 모두 부럽습니다.” 그래도 그는 목소리만큼은 남부럽지 않다고 했다. 자기 목소리가 우월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다만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로 목소리만한 것이 없다고 장기하는 생각했다. “제 목소리도 수많은 목소리들 중 하나일 뿐이에요. 그래도 이걸로 일 잘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부럽진 않아요.”

장기하는 “목소리가 곧 나의 정체성”이라며 첫 솔로음반을 목소리 중심으로 꾸렸다. 반주 없이 목소리로만 신곡을 녹음한 뒤 그에 맞는 소리를 최소한으로 넣는 방식이었다. 실마리를 잡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는 2018년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해체한 뒤 2년여 간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성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환기가 필요했던 걸까. 장기하는 고향 서울을 떠나 경기 파주에 머무르며 음반을 구상했다. 파주 출판단지와 임진각을 잇는 자유로가 영감의 호수였단다. 매일 같이 이곳을 드라이브하면서 불시에 떠오르는 문장을 낚아채 노랫말로 옮겼다고 했다.

장기하.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이렇게 완성된 노래는 ‘뭘 잘못한 걸까요’, ‘얼마나 가겠어’, ‘부럽지가 않어’ 등 5곡. 장기하는 이 곡들을 엮어 ‘공중부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노래들에서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곡들을 모아 놓으니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중요한 뭔가가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거든요.” 사운드 면에서도 ‘공중부양’은 무중력에 가깝다. 음악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베이스가 빠져서다. 장기하는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연중에 ‘장기하와 얼굴들 음악과는 사운드는 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면서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이 밴드 때와는 달랐다”고 설명했다.

신보를 낸 장기하는 협업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앞서 래퍼 마미손, 그룹 리쌍, 밴드 혁오 등 여러 장르 아티스트들과 함께 노래를 냈고, 다음 달 여는 공연에선 안무가 윤대륜, DJ 디구루, 무대미술가 여신동과 뭉친다. 장기하는 “이번 음반은 나 혼자 만들었으니 앞으로는 누군가와 함께 만들고 싶다. 가수, 프로듀서, 연주자, 영상 아티스트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과 재밌게 협업하고 싶다”며 “신보는 내 음악 경력 2기를 여는 시작점이자 나를 보여주는 자기소개서 같은 의미”라고 말했다.

“장기하와 얼굴들로 활동한 10년은 좋은 추억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시절이에요. 음악 시장에도 나름 괜찮은 흔적을 남겼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이 음반이 일상에서 느끼는 여러 재미 중 하나만 돼도 만족해요. 다른 아티스트들에겐 ‘장기하와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만들고 싶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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