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한계에 가두지 않는다. 편견을 깨고 벽을 뛰어넘는다.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결국 스스로가 새로운 표준이 된다. 누군가에겐 도전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무모한 모험이다. 박수 받은 순간보다 외로운 순간이 더 많았을 시간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여성들의 행보는 그래서 더 값지다. 잘해왔고, 잘해낼 여성들의 순간들.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쿠키뉴스 대중문화팀이 가수 이효리, 배우 배해선, 방송인 장영란의 순간들을 돌아봤다.
이효리, 계보를 만들다
계보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전 세대가 남긴 족적을 다음 세대가 유산으로써 이어받을 때 비로소 계보가 생긴다. 이효리는 여성 가수 계보의 한 가운데 선 인물이다. 한국 가요계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평가받는 그는 JTBC ‘효리네 민박’ 시리즈와 MBC ‘놀면 뭐하니?’의 환불원정대 프로젝트, 티빙 오리지널 ‘서울체크인’에서 아이유·엄정화·보아 등 선후배 여성 가수들을 만나 말 못했던 고민들을 나눈다. “언니는 언니 없어 어떻게 버텼어요? 언니는 위에 이런 선배가 없잖아요.”(이효리가 엄정화에게), “그게 부담스럽기는 해요. 좋은 본보기로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보아가 이효리에게), “더 자유로워. 내가 뭘 하든 별로 쳐다보지 않으니까, 내 마음대로 하자.”(김완선이 이효리에게), “잘될 때 즐기는 것도 중요한데, ‘이거 다음에 안 될 거야’만 생각하느라 행복한 틈이 조금 없었어요.”(아이유가 이효리에게)…. 홀로 앓던 고민이 실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 느끼는 위로는 실로 강력하다. 태산 같이 커 보이던 우상이 실은 나와 같은 고민을 뚫고 지나왔음을 알게 될 때 생기는 용기 또한 실로 막강하다. 젊음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연령주의와 여성에게는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여성혐오 안에서, 이효리는 선·후배 가수들 사이에 연대의 다리를 놓으며 서로를 붙든다. 서로의 언니이자 동생이 돼 주고받는 힘은 여성들을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배해선, 40대 직장인의 입체적인 얼굴
연극·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던 배해선이 영상매체로 넘어온 건 2015년, 그의 나이 42세 때다. 이성애 로맨스의 당사자로 여겨지지 않는 40대 배우들 대부분이 그랬듯, 배해선에게 주어진 역할들은 기껏해야 주인공의 직장 상사나 조력자 정도였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인물들을 연기하면서도 배해선은 언제나 특출 나게 돋보였다. 유방외과 의사를 연기한 SBS ‘질투의 화신’에선 차분한 태도와 신뢰감을 주는 말투로 캐릭터의 전문성을 살리는 한편, 카리스마와 온정, 코믹함까지 보여주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에서는 성차별이 만연한 직장에서 반은경이 겪었을 분투를 극단적인 감정 기복과 과도하게 영어를 남발하는 습관으로 에둘러 보여줬다. 주인공 주변에 머무르던 배해선이 작품 중앙으로 뛰어든 건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서다. 야당 중진의원 차정원을 연기한 그는 그간 벼려온 야수성을 이 작품에서 폭발시켰다. 빠르게 판세를 읽고, 느물거리며 야합을 시도하고, 웃는 얼굴로 칼을 뱉어내며 남자들만 득실대는 세계에서 살아남은 차정원은 선악으로 이분하기 어려운 매력적인 인물이다. 배해선은 야심찬 정치인의 면모들을 다층적으로 풀어내며 ‘유능하다’ ‘똑 부러진다’는 말에 고정돼 있던 40대 여성 직장인의 모습에 입체성을 부여했다. 시간과 내공을 함께 쌓은 배해선의 얼굴이 또 누구를 표현해낼지 궁금하다.
장영란, 생존의 역사
남들보다 높은 목소리 톤, 우렁찬 성량, 누군가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는 씩씩한 태도. 예능인으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도 장영란은 한때 비호감으로 낙인 찍혔다. SBS ‘리얼로망스 연애편지’에서 여성 출연자를 질투하고 남성 출연자에게 ‘들이대는’ 모습이 시청자들 눈 밖에 나서다.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큰 리액션과 망가짐을 불사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활발함 덕분에 MBC ‘세바퀴’, KBS2 ‘스타골든벨’ 등 여러 예능에 고정으로 출연했지만, 그 자신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반전의 계기가 된 건 지난해 공개된 웹예능 ‘네고왕2’. 광희의 뒤를 이어 ‘네고왕’ 새 주인이 된 장영란은 특유의 넉살과 호응으로 방송이 익숙지 않은 시민들을 카메라 앞으로 끌어들였고, 기업 사장들을 쥐락펴락하며 가격 할인을 이끌어냈다. 데뷔 초 가수들을 즉석에서 인터뷰했던 VJ 경험이 자양분이 됐다. 돌아보면 장영란은 자신의 무엇도 헛되이 하지 않았다. 가사와 육아 경험은 TV조선 ‘아내의 맛’, 채널A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등에서 활약할 발판이 됐고, 2009년 트로트 가수로 활동했던 이력은 TV조선 ‘미스(터)트롯’ 시리즈로 그를 데려갔다. 목소리가 크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여성을 ‘비호감’으로 분류하던 시기를 통과해 장영란은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더는 남들 기준에 맞춰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