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데프콘은 지난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이 섞인 외투를 입고 투표소로 향했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등 주요 정당 상징 색깔이 모두 프린트된 그의 옷은 온라인에서 ‘중립 룩(옷차림)’으로 불리며 화제를 모았다. TV조선 ‘미스트롯’ 우승자인 가수 송가인은 의상을 온통 흰색으로, 그룹 몬스타엑스는 검은색으로 통일한 채 투표소에 나타났다. 옷 색깔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도록 원천 차단한 셈이다.
대선 전후 연예계에 내려진 ‘색깔주의보’는 투표소 밖에서도 이어졌다. 한 여성 아이돌은 사전 투표 당일 분홍색 옷을 입고 브이라이브 방송을 켰다가 ‘의상 색이 의미하는 게 있냐’는 질문을 받고 “전혀 없다”고 강조하며 화면을 흑백으로 전환했다. 팬들에게 보내는 폐쇄형 메시지에 “요즘 초록색이 좋아진다”고 적었다가 “초록색 정치에 뭐 연관된 게 있나. 괜히 조심스럽다”고 덧붙인 남성 아이돌도 있다. 빨간색을 자주 쓰면 국민의힘 지지자로, 파란색을 자주 쓰면 민주당 지지자로 여기는 온라인 여론이 빚어낸 풍경이다.
카메라 앞에서 흔히 취하던 ‘엄지 척’ 포즈나 ‘손가락 브이(V)’ 포즈도 한동안 금기시됐다. 각각 기호 1번, 기호 2번 후보를 지지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어서다. 그룹 에이티즈는 지난 5일 사전 투표소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주먹을 불끈 쥐거나 외투 주머니에 손을 숨겼다. 손가락을 보여주지 않으려 낸 고육지책이었다. 온라인에선 한 남성 아이돌 가수가 사진 촬영 중 손가락 모양 때문에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주먹을 쥐는 ‘움짤’(움직이는 사진)이 퍼지기도 했다.
이런 촌극에도 이유는 있다.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면 반대 진영 지지자들로부터 악성 댓글 등 공격 대상이 되기 때문”(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이다. 온라인 여론에 크게 영향 받는 아이돌 가수들은 ‘자체 검열’ 수위가 높다. 일부 중견 가수·배우 등이 지지 후보를 공개적으로 밝혔던 것과 달리, 아이돌 가수들은 탈정치화된 존재로 남아야 했다. “아이돌은 정치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중립이어야 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던 지난해 11월, 한 남성 아이돌 가수가 라디오 방송에서 남겼던 이 말은 ‘정치 표백’ 상태인 업계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현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번 대선은 ‘비호감 선거’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유력 후보자들을 둘러싼 여론이 좋지 않았다. 워낙 박빙 승부였던 데다, 양 측 지지자 간 갈등도 심했기 때문에 연예인들도 더욱 조심스러워했던 것 같다”고 짚었다. 배우 김의성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공개 지지한 뒤 SNS에서 “좌빨 앞잡이” “X자식” 등 욕설 메시지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인을 지지한다고 밝힌 개그맨 최국도 YTN뉴스에서 “상대 진영에서 몰려와 악성 댓글을 달아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때가 있다”고 말했다.
김 평론가 “유명 인사가 정치 성향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원색적인 인격모독을 가해 발언을 위축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면서 “시민들의 인식 변화와 더불어 선거가 전쟁이 아닌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정치권에서도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