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제 자리로 왔다. 23일 개봉한 영화 ‘뜨거운 피’는 천명관 감독의 데뷔작이다. ‘고래’, ‘고령화 가족’ 등을 쓴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출발은 영화였다. 1994년 개봉한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감독 장길수) 시나리오를 쓴 것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영화판을 맴돌았다. 18년을 소설가로 살았지만, 30년을 영화인으로 살았다.
지난 17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천명관 감독은 “감회가 남달라야 하는데 사실 특별하게 그렇진 않다”고 감독 데뷔 소감을 담담하게 전했다. ‘뜨거운 피’는 동료 작가인 김언수의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화했다. 천명관 감독이 쓴 소설 ‘고령화 가족’이 2013년 송해성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고, 그동안 쓴 영화 시나리오만 10편은 된다. 2016년 발표한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도 영화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감독으로 첫 작품은 다른 소설가의 작품이 됐다. 천 감독은 “매우 아이러니한 경험”이라며 웃었다.
“저도 나름 이야기꾼이라 불리고 제 이야기가 있는데 왜 다른 작가 작품으로 데뷔했을까요. 제가 쓴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로 데뷔하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를 돌아다니기도 했고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 안 됐어요. ‘뜨거운 피’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너무 엉뚱한 제안이라 생각했어요. ‘뜨거운 피’의 원작자인 김언수 작가가 저에게 연출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뜨거운 피’를 가장 잘 이해하는 제가 영상으로 잘 구현할 것 같다고 믿어뒀거든요. 무엇보다 소설이 재밌고 매력적이었어요. 다른 사람이 하면 아까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욕심을 냈죠.”
2016년 발표된 원작 소설 ‘뜨거운 피’는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다. 1993년 부산 변두리 구암에서 건달들의 보스인 손영감을 모시는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으로 마흔 살을 맞은 희수의 이야기를 다뤘다. 장황한 이야기를 2시간 분량으로 압축해야 하는 각색 과정부터 난항이었다. 분량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다 할 수 있는 소설과는 달랐다.
“소설은 100% 혼자 쓰잖아요. 누구도 관여하지 않고 단어 하나까지 다 작가가 결정하고 쓰죠.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고 자본의 검열이 있어요. 이 영화가 재밌는지, 돈을 투자해서 본전을 뽑을 수 있는지 엄격한 허들이 있고, 그걸 통과하는 게 어려워요. 또 영화는 분량을 2시간 내외로 맞춰야 하잖아요. 거장은 4시간 분량도 가능하겠지만 전 어려운 일이죠. 소설은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더 있으면 다 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어려움을 많이 느꼈어요. 영화를 하다가 다시 소설을 쓰니 자유로움을 느꼈죠.”
천명관 감독의 정체성은 언제나 충무로에 있었다. 소설가로 유명해졌지만, 지금도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2004년 소설 ‘고래’로 데뷔하기 전, 이미 10년을 영화인으로 살았다. 천 감독은 “언제나 마음속에 영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상적인 코스는 아니었어요. 보험회사에서 외판원을 하다가, 서른 살에 ‘영화를 하고 싶다’는 이상한 영감을 받았죠. 연출부 일을 하려고 해도 이미 조감독이 저보다 어리니 써주나요. 영화사에서 비품이나 주차 관리를 하는 총무로 일을 시작했어요. 연출부 외에 궂은일은 다 해봤어요. 우연한 기회에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연출에 대한 꿈을 가졌지만 일이 꼬여서 신용불량자가 되고 마흔 살이 넘었을 때 충무로에서 쫓겨났죠. 꿈을 포기하기도 하고, 완전히 잊어버린 시절도 있어요. 하지만 언제나 영화 창작에 대한 꿈이 있었죠. 소설가라서 다른 감독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순수한 영화감독, 순수한 영화인으로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영화를 준비할 때도, 촬영할 때도, 후반 작업을 할 때도 천명관 감독 머릿속엔 매번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을까.” 때로는 ‘내가 이 영화를 완전히 망쳤구나’. ‘쓰레기더미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여파로 영화 개봉이 2년 미뤄지며 준비부터 개봉까지 총 5년이 걸렸다. 시사회 상영관 관객석에 앉아서야 ‘아, 그래. 이게 참 멋진 일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감회가 새로웠어요. 근사하더라고요. 영화가 근사하지 않아도 이 일은 매우 멋진 일이에요. 다음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다음에 하면 또 헤매겠지만요. 다 그런 거죠, 감독이란 게.”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