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법이 산 사람을 위협한다 ‘의약품 급여정지’

죽은 법이 산 사람을 위협한다 ‘의약품 급여정지’

기사승인 2022-03-31 06:30:02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박효상 기자

내가 원하지 않았고, 의학적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먹던 약을 바꿔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불법 리베이트와 관련된 의약품에 건강보험 적용을 한시적으로 정지하는 제도가 수년 전 폐지됐지만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애먼 환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당국이 유연한 행정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불법 리베이트를 제공하다 적발된 제약회사의 제품 일부에 건강보험 급여를 정지하는 제도가 2014년 7월 도입됐다. 리베이트 관련 약에 급여를 제한해 제약사에 불이익을 줌으로써 악습을 근절하겠다는 게 제도 도입 취지였다. 급여가 정지되면 약값 전액을 환자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처방이 어려워져 사실상 해당 의약품이 시장에서 퇴출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제도가 시행되자 환자가 피해를 보는 일이 생겨났다. 

보건복지부는 2017년 불법 리베이트를 제공하다 적발된 노바티스의 23개 제품에 급여정지 처분을 내렸는데, 환자들과 의료진이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 급여정지 처분을 받은 제품 중에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도 포함됐는데, 약을 잘 먹던 환자들이 치료제를 바꿔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환자들은 처방약을 바꿨다가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 거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결국 복지부는 글리벡 급여정지 대신 제약사에 과징금을 부과했다.

한바탕 소동을 겪은 후 리베이트 의약품 급여정지 제도는 도입 3년 9개월만인 2018년 3월 폐지됐다. 이후 2018년 9월 이후부터 리베이트 제공에 대한 벌칙성 행정처분은 1, 2차 처분 시 ‘약가인하’, 3, 4차 처분 시 ‘급여정지’로 정리됐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에는 3차 또는 4차 처분을 받는 경우에도 리베이트 의약품이 환자 진료에 불편을 초래하는 등 공공복리에 지장을 줄 것으로 예상되면 과징금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다.
 
하지만 리베이트 의약품 급여정지 제도는 여전히 살아있다. 제도가 운영된 3년 9개월 사이에 리베이트를 제공했다가 적발된 약제는 급여정지 처분 대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수의 제약사가 자사 약에 대한 급여정지 행정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 환자단체 인사는 “잘못을 했다면 처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면서도 “그런데 환자는 왜 피해를 봐야하느냐”고 고개를 저었다. 

의약품은 경우에 따라서는 생물학적 동등성이 인정되더라도 치료적 동등성에 차이가 있다. 사실상 같은 약으로 분류됐더라도 치료현장에서는 다른 효과를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비의학적 이유로 급히 의약품을 변경할 경우 치료 기회를 상실하는 등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설령 허가받은 첨가제라고 하더라도 아나필락시스, 알레르기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데, 동일한 성분의 의약품들 간에도 첨가제가 다를 수 있다.

환자의 건강권 침해만이 아니다. 의약품 급여정지 제도는 요양기관에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는 문제도 있다는 지적이다.

급여정지 처분이 내려지면 기존에 사용하던 약제를 대신할 약품을 구매해야 한다. 또, 급여정지가 풀린 후에 기존 약품을 병·의원에서 다시 처방할지 불투명하기 때문에 반품문제가 발생한다. 모두 일선약국에 부담을 주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업계 관계자는 “급여정지 행정처분이 한 회사의 1~2개 정도라도 행정적으로 부담이 되는데, 다수 품목이 동시에 급여정지가 된다면 상당한 혼란과 불편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환자들 중에는 의약품이 변경된 것에 대해 약국에서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부담”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환자나 요양기관이 피해를 보지 않으면서 잘못을 저지른 제약사는 효과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지된 법제도에서는 △임상적으로 동일한 대체 약제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대체약제의 처방 및 공급·유통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경우 △요양급여 정지 대상 약제의 환자군이 약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경우 △사실상 요양급여 정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경우 의약품 급여정지 대신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예외규정을 뒀다.

신승헌 기자 ssh@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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