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와외즈 빠끄(Joyeuses Pâques)! 프랑스어로 부활을 축하합니다!란 말이다. 영어로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라 한다. "축 부활", "찬미 예수님, 부활을 축하합니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다. 나는 어제 2CELLOS의
이런 사랑의 하나님에게 가는 길은 '예수가 하나님이다'라고 끊임없이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 분 사랑이 우리에게 완성됩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머무르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요한 1서 12-16)
예수의 부활절은 각자 스스로 변화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터닝 포인트를 주는 날이다. 그래서 부활은 희망이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된 낡은 악습과 어두운 절망은 모두 무덤 속에 묻어두고 희망 가득한 새 삶으로 이 봄과 함께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고, 우리가 부활의 의미로 사는 것이다. 그 길은 봄처럼, 얼어붙은 땅을 뚫고 어린 생명이 싹을 틔우듯이 노력을 해야 한다.
"두보(杜甫)의 시 절구(絶句) 중에 '올봄도 보아하니 또 지나간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싹이 돋고 꽃이 핀다고 봄이 아닙니다. 봄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 의미가 있지요. 긴 겨울을 버텨온 사람만이 이 계절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조광호 신부). 여기에 이런 덧붙임을 한 분은 정경숙이라는 분이다. <오마이뉴스>에서 만났다. "돌아보면 힘든 시간이었지만, 괜찮다. 묵묵히 버티며 잘 살아냈다. 아픈 만큼, 강인하게 언 땅을 딛고 일어날 것이다. 이제 다시 봄이다."(정경숙).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이 지상을 떠난 사람의 자취는 그가 남긴 사물 에서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된다. 죽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아마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이다. 죽은 몸이 벌떡 일어나지 않아도 그것이 어쩌면 부활이 아닐까?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들을 위해서 죽으려고 했고, 삶 전체를 걸고 복음을 알림으로써 남을 구원하려고 했기에 구원받은 거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특권과 독점의 나라에 살던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서 더 살고 싶어한다. 서로 고마운 관계임을 알고 사랑을 실천해야 성숙하고 건강한 사회가 된다. 예수의 부활을 기억하며. 예수의 부활절은 우리에게 평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각자 스스로 변화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터닝 포인트를 주는 날이다. 평화는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상태"로 부단히 노력해야 이루어진다. 봄처럼, 얼어붙은 땅을 뚫고 어린 새 생명이 싹을 틔웠듯이, 희망의 싹을 갖고 새로 뽑힌 대통령과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부활은 희망이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된 낡은 악습과 어두운 절망은 모두 무덤 속에 묻어두고 희망 가득한 새 삶으로 이 봄과 함께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고, 우리가 부활의 의미로 사는 것이다. 부활절에 나는 "낫싱 스페셜(Nothing Special)!"라는 말을 소환했다. 프랑스어로는 "빠 드 스페이시알(Pas de special)!"이다. 류시화 시인은 이것을 한국 말로 이렇게 옮겼다. "큰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
나는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무엇이 살면서 중요한가"라고 물으신 예수님의 첫 번째 물음을 좋아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마태복음 6장 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