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에 ‘필리핀 열풍’이 불고 있다.
프로농구연맹(KBL)은 지난 2020년 아시아 쿼터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외국인 선수 제한과 별도로 아시아 지역의 국적을 보유한 선수를 추가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KBL은 도입 후 두 시즌 동안은 일본 선수들에게만 제도를 적용했다. 귀화, 이중국적, 혼혈 선수 등은 제외돼 영입할 수 있는 선수가 상당히 한정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 제도를 통해 한국 무대를 밟은 선수는 나카무라 타이치(전 원주 DB), 단 한 명 뿐이다. 이마저도 이상범 DB 감독과 개인적 인연에 따른 것인지라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불리기도 했다.
지난 2년간 재미를 보지 못한 KBL은 지난 4월에는 아시아 쿼터 제도의 적용 범위를 넓히면서 필리핀 선수 영입을 허용했다. 선수 영입 기준은 본인(귀화 제외) 및 부모가 필리핀 국적인 경우에 한해 구단 자율 영입 및 1명 보유가 가능하다.
제도 개편 후 필리핀 선수를 영입한 구단은 총 4팀이다. 대구 한국가스공사가 가드 SJ 벨란겔을 영입했고, 창원 LG도 저스틴 구탕을 데려왔다. 아직 구단의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울산 현대모비스가 론 아바리엔토스를, 서울 삼성이 윌리엄 나바로를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선수들에게 관심이 적던 KBL 구단들이 필리핀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이유는 ‘가성비’ 때문이다.
PBA(필리핀리그)는 필리핀 선수들에게 연봉이 아닌 월봉을 지급한다. 한 시즌에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은 42만 페소(약 1000만원)로 정해져 있다. 컵 대회 우승 수당 등 각종 옵션이 붙어 추가 보수를 챙기는 식이다. 대학을 막 졸업한 신인의 월봉은 20만페소(약 480만원)로 제한된다.
자국 리그에서 많은 금액을 받지 못하면서 해외 무대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중 일부 선수들이 KBL 구단들과 이해 관계가 적절히 맞아 떨어지면서 한국 무대를 밟게 됐다. KBL 구단들과 계약한 필리핀 선수들의 연봉은 1억원 내외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국리그에서 뛸 때 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챙겨가는 셈이다.
구단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금액으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할 수 있게 됐다. KBL의 발표에 따르면 차기 시즌 국내 선수 1인당 평균 연봉은 1억6076만원이다. 아시아 쿼터 선수의 보수는 국내 선수 샐러리캡(총연봉 상한제)에 포함된다. 국내 선수보다 연봉이 낮지만, 실력이 엇비슷 하다면 영입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 필리핀이 영어권인 만큼 일본 선수와 달리 별도 통역을 붙일 필요가 없어 추가 부대 비용이 없다는 점도 구단 입장에서는 매력적이다. 과거 DB에는 외국 선수들을 위한 영어 통역가 외에도 타이치를 위한 일본어 통역가까지 총 2명의 통역가가 있었다.
한 농구계 관계자 A씨는 “일본 선수들의 경우, 국내 선수들과 몸값이 크게 차이 나지 않거나, 혹은 높은 경우가 대다수다. 일본 선수들을 데려올 경우, 금액적인 손해가 더욱 컸다. 이로 인해 구단들이 일본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호의적이지 않았다”라면서 “필리핀 선수들의 경우, 선수들이 한국에 적응해야 하는 점은 일본 선수들과 동일하지만 상대적으로 연봉이 저렴하다는 가장 큰 장점이 있다. 국내 선수 슬롯이 하나 빠질 만큼의 가성비는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통역가나 음식 같은 부대 비용은 시즌을 본격적으로 치러야 정확히 계산되겠지만, 구단들은 이 부분을 충분히 감수할 부분이라고 보는 듯 하다”라면서 “또 필리핀은 농구가 국기라서 선수들이 필리핀 자국에서 인기도 상당하다. 이 점을 구단들이 활용해 마케팅을 펼친다면 수입도 기대해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필리핀 선수들의 기량도 구단들이 영입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조직력을 중시하는 국내 농구와는 다르게 모든 선수들이 일대일 공격을 할 정도로 개인기가 뛰어나다. 일대일 공격은 기본이고, 과감한 공격성은 국내 선수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이번에 KBL 무대를 밟는 선수들 중 일부는 국가대항전을 통해 국내 팬들에게도 알려진 선수들이다. 현대모비스 입단을 앞둔 아바리엔토스는 지난 6월 안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번째 평가전에서 17점 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밸란겔은 지난해 6월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 예선 한국전에서 종료 직전 버저비터를 넣어 한국 대표팀에 비수를 꽂기도 했다.
농구계 관계자 B씨는 “KBL의 조직적인 수비, 트랜지션 게임이나 한국의 문화 등에 빨리 적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필리핀 선수들의 개인 능력만 놓고 보면 KBL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이라고 본다. 피지컬이 한국 선수들에 비해 부족할 수도 있지만, 개개인의 공격성은 상당히 뛰어나다”라면서 “이번에 필리핀 선수를 영입한 구단들이 지난 시즌 하위권 팀인데, 시즌 초반에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다면 상위권 구단들도 향후 관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찬홍 기자 kch0949@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