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의료계는 반대 목소리를 냈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안락사 논의보다는 질 높은 생애말기 돌봄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2일 국회에서 ‘안락사 허용보다 더 시급한 과제 생애말기 돌봄 체계화’ 토론회를 열고 조력존엄사 법제화를 논의했다.
앞서 안규백 민주당 의원은 ‘의사 조력 존엄사법’을 대표발의했다. 의사 도움 하에 자살 합법화가 핵심이다. 지난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며 의미 없는 연명의료를 중단 또는 보류할 수 있게 됐지만, 이는 임종기 환자에게만 적용된다. 말기 환자나 식물 상태 환자 등에겐 인공호흡기를 떼거나 심폐소생술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 말기 환자에게도 의사가 약물 등을 제공해 환자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법의 취지다.
그러나 이 법안을 두고 의료계와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한다. 의사조력자살 논의 이전에 낙후한 호스피스(죽음을 앞둔 환자에 대한 돌봄 서비스) 인프라부터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민 여론도 의사 조력 자살 합법화 보다는 생애말기 돌봄체계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가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5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100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80.7%가 “의사조력자살 법제화보다 말기 환자의 돌봄환경과 호스피스·완화의료 확충이 우선한다”고 답했다.
임종기 돌봄 대상자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인프라는 미비한 실정이다. 김대균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기획이사에 따르면 서울에 입원 가능한 호스피스 전문기관은 15개 기관으로 260병상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여파로 여러 공공병원이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7개 기관 105개 병상만 호스피스 병상으로 운영됐다. 이 중 간병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만 추리면 3개 기관 50병상에 그친다.
국내 입원형 호스피스 서비스 제공기관이 한정적인 탓에 호스피스 돌봄을 받은 경우도 드물다. 2020년 서울 호스피스 대상 질환 사망자 1만4377명 중 3186명(22%)만이 호스피스 돌봄을 받았다. 호스피스 수요자가 많아 대기 기간도 길다. 서울은 3~4주, 경기도나 인천은 1~3주의 대기 기간이 필요하다. 대기 중 임종을 맞는 이들도 상당하다.
전문가들은 의사 조력 존엄사법 논의 이전에 호스피스·완화의료 시스템 확충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이연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는 “조력존엄사 허용 법제화는 시기상조”라며 “조력존엄대상자 및 조력 존엄사의 정의를 신설하는 내용의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해 의협은 강력 반대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반대 이유로는 △조력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및 합의 부족 △생명경시 사회 풍조 만연 우려 △자살예방법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과 상충 △조력존엄사심사위원회 구성 문제 및 객관적 평가 근거 미비 △조력존엄사의 최종 이행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방안 미흡 등을 꼽았다.
이석배 단국대 법과대학 교수도 “환자의 자기결정권 증진이라는 취지는 공감한다. 하지만 방향이 틀렸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자살할 권리는 포함되지 않는다”면서 “의료비 때문에 가족이 연명의료중단을 요청하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의료비 걱정 없이 연명의료 지속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논의의 진정성이 인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국회와 정부는 말기 환자에 대해 질 높은 생애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실패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법률을 만들어 말기 환자가 생을 일찍 마감할 수 있게 하는 건 주객전도”라고 꼬집었다.
신 의원은 “고령화와 돌봄 취약성으로 안락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그러나 국민의 생명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질 높은 생애말기 돌봄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호스피스 제도개선을 약속했다. 한상균 복지부 질병정책과장은 “정부는 현재 23%에 머무르고 있는 호스피스 이용율을 30%대로 증가시키고 동시에 입원형에 치중돼있는 서비스 유형을 다양화시키기 위해 노력 중” 이라며 “제도상의 미비점을 관계기관과 협력해 개선해 나가겠다”고 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