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 ‘재산목록 1호’는 전화였다. 지금처럼 공급이 원활하지 못할 땐 전화 한 대(270만원)가 서울 50평 아파트 한 채(230만원)보다 비쌌다. 전화를 사고팔거나 전·월세를 주는 ‘전화상’도 횡행했다. 정부가 법을 고칠 정도로 부조리가 심했다. 전화 보급은 그러나 ‘TDX-1’을 계기로 대전환을 맞는다. 한국은 1984년 미국⋅영국⋅프랑스 등 세계 10번째로 전전자교환기를 개발했고, 2년 뒤 상용화했다. TDX-1은 전북 무주와 경기 가평·전곡, 경북 고령 등 4개국에서 개통했다.
우리나라는 1987년 전국 전화 1000만 회선을 구축하며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TDX는 개선을 거듭했고, 이에 맞춰 통신부가서비스도 다양해졌다. 1998년 한빗(HANBit) ATM교환기와 함께 연구개발은 종료됐지만, TDX는 분명 국내 통신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다.
이인학 정보통신역사연구소 소장은 TDX 개발을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이 소장은 “TDX-1 때문에 우리나라 정보통신이 가속적으로 발전했다”고 강조했다.
16일 강원도 원주 KT 통신사료관에서 ‘TDX-1’ 등 진귀한 실물 사료를 접했다. KT가 사료를 외부에 공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장사료만 6150건이다. 벽괘형 공전식 전화기·인쇄전신기 등 8건이 문화재로 등록돼있다. 가장 오래된 사료는 1800년대 말에 쓰인 전화기 ‘덕률풍’이다. ‘텔레폰(Telephone)’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등록문화재 433호인 인쇄전신기는 타자를 치며 종이에 메시지를 인쇄할 수 있어 서면통신 속도를 향상시켰다. 인쇄전신기는 영화 <헌트> 소품으로도 쓰였다. 근현대 대한민국 수출업무에 필수였던 텔렉스 실물도 보관돼있다. 텔렉스가 없으면 당시엔 장사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시대별 공중전화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초기 공중전화도 ‘돈 먹는 하마’였다. 120년 전 처음 우리나라에 공중전화가 도입됐을 때, 1회 요금(50전)으로 쌀 다섯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동전주입식 공중전화는 또 잔돈을 거슬러주지 않았다. 이런 불편함은 쓰는 만큼 차감되는 공중전화 카드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통화가 귀했던 시절이라 옛 전화기엔 하나 같이 ‘용건만 간단히’라는 문구가 써있었다. 삐삐(무선호출기)도 원형 그대로 보존돼있었다. 현대 ‘앨리스’ LG ‘프리웨이’ 모토로라 ‘프리스피릿’ 등 대기업들이 삐삐사업도 했다는 게 새삼 놀랍다.
대한민국 주요 현장과 함께한 KT
사료관에선 KT 발자취도 엿볼 수 있다. KT 뿌리는 137년 전 개국한 한국전보총국이다. KT 전신은 한국전기통신공사(KTA)다. ‘KTA’ ‘한국통신’을 거쳐 지금의 ‘KT’로 사명을 바꾸기까지 KT는 숱한 국가 주요 현장과 동행했다.
KT는 86년 아시안게임기간 전 세계 보도를 지원했고 88 서울올림픽 경기를 생중계하며 우리 기술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2002 한일 월드컵 땐 통신총괄 주관기관으로서 3G(3세대 이동통신)을 국내에 처음 선보였다. 축구로 전국이 들썩이던 그 해에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고객 집을 방문하면 환대를 받았단다. KT는 이밖에 △APEC 정상회의(2005) △8·15 남북이산가족 화상상봉(2005) △2차 남북정상회담(2007) △G20 정상회의(2010)을 성공적으로 지원했다. 아이폰을 국내에 처음 들인 통신사도 KT다.
송금종 기자 song@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