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는 흉내를 겁내지 않는다.” 새내기 연기 학도는 책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를 읽다가 이 구절을 찍어 SNS에 올렸다. 자신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연기로 감정을 분출하는 게 마냥 짜릿했다”던 20세 청년은 6년 뒤인 2021년 신들린 성대모사로 세간의 관심을 샀다. 배우 주현영이다.
지난해 쿠팡플레이 ‘SNL코리아’에서 20대 인턴 주 기자를 연기해 화제를 모은 주현영이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뽐냈다. 지난 18일 종영한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를 통해서다. 주현영은 주인공 우영우의 단짝친구 동그라미를 연기했다. 고용주에게 냅다 “10만원만 주세요”라고 랩을 하는 등 주 기자의 ‘똘끼’를 쏙 빼닮은 인물이다. 그런데 25일 서울 상암동 쿠키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주현영은 뜻밖의 얘기를 들려줬다. “부담과 무서움이 큰 캐릭터였어요. 감히 제가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저지르곤 했으니까요.”
사실 주현영은 동그라미보단 배우 하윤경이 연기한 ‘봄날의 햇살’ 최수연을 더 탐냈다. 우영우(박은빈)를 동경하고 안쓰러워하지만 열등감도 느끼는 복잡한 심경에 공감해서였다. 이런 주현영을 유인식 감독과 문지원 작가가 동그라미 역에 강력 추천했다. 주 기자에게서 동그라미의 ‘똘끼’를 봤다는 이유였다. 주현영은 “연기가 인위적으로 보일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감독님과 작가님이 저를 굳게 믿어주셨고, 그에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했다”고 말했다.
동그라미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편견 없는 자세로 우영우를 대한다. 주현영은 “그라미는 영우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며 “그라미가 영우를 지켜줬듯 영우도 그라미를 지켜줬기 때문”이라고 봤다. 실제 동그라미는 조부모의 유산 분배 문제를 두고 부모와 삼촌 사이 갈등이 벌어지자 제일 먼저 영우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주현영은 “대본을 보면서 내게도 (장애인을 향한) 편견이 있는지 되돌아봤다.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글을 써주신 작가님 덕분”이라고 돌아봤다.
“동그라미는 단순한 아이예요. 그래서 솔직하게 세상을 보고 꾸밈 없이 반응하죠. 편견도 없고요. tvN ‘코미디 빅리그’에서 안영미 선배가 연기한 김꽃두레 캐릭터와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아이키 선배님을 보면서 동그라미를 완성했어요. 솔직하고 거침없으면서 때론 시니컬한 면모를 참고하려고 했습니다. 일본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통통 튀고 만화 같은 캐릭터들도 많이 봤고요.”
뭐든 시원시원한 동그라미와 달리 주현영은 “걱정이 워낙 많아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성격이다. ‘SNL코리아’와 ‘우영우’가 연속으로 흥행하고, 영화 ‘2시의 데이트’(감독 이상근)와 tvN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 등 차기작이 줄을 짓는 상황에서도 그에겐 남모를 고충이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오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제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다고 느끼거든요.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절 믿고 캐스팅한 분들에게 폐가 될까봐 걱정이 컸어요.”
이런 그에게 자신감을 준 건 동료 배우들이었다. ‘2시의 데이트’를 함께 촬영한 배우 임윤아는 수시로 주현영에게 ‘네 재치가 좋다’ ‘네게서 힘을 얻는다’며 칭찬을 퍼부었다.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성동일은 촬영 틈틈이 연기 지도를 해줬다고 한다. ‘우영우’에서 함께 호흡한 박은빈, 하윤경, 임성재, 주종혁과도 서로 힘을 나눴다. 주현영은 “배우들 모두 서로를 향한 애정을 주저 없이 표현했다. 덕분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어린 시절 사촌 동생을 데려다가 막무가내로 단편 영화를 찍던 소녀는 결국 배우가 돼 새로운 세상을 그린다. 주현영은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땐 내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는 게 재밌었다”며 “배우가 된 뒤 고민의 깊이가 달라졌다. 하지만 연기하며 느끼는 괴로움마저 즐겁다”고 했다. 요즘 그는 ‘척하지 말자’는 다짐을 자주 되새긴다. 연기란 결국 가상 세계를 표현하는 거짓말이다. 주현영은 그 거짓말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표현하고 싶어 했다.
“연기를 하려면 저를 잘 알아야겠더라고요. 그래야 다른 사람이 어떤지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괴롭기도 했지만, 그 고통마저 짜릿해요. 저는 동그라미와 다르게 체면을 많이 차리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진짜 제가 아닌 모습을 꺼낼 때도 있어요. 그런데 자꾸만 척하다 보면 연기에도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연스럽게. 어렵지만 그렇게 연기하고 싶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