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형제의 막장 강도짓...친일로 재산축적 "왜 구제 안해" [근대뉴스]

친일파 형제의 막장 강도짓...친일로 재산축적 "왜 구제 안해" [근대뉴스]

[MZ세대를 위한 '현대문으로 읽는 근대뉴스']
조선 경찰권 일본에 넘긴 민병석 저택 습격한 강도는 오촌 조카
강탈 금장 시계는 '이왕직장관' 민 자작의 하사품

기사승인 2022-10-05 11:44:29
1929년 4월 27일

지난 15일 오전 2시 경성부 경운동 89번지 전 이왕직장관 민병석 자작의 집에 복면한 강도가 들어 민 자작의 장자 민홍기를 흉기로 협박, 현금 오십 원과 금시계를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강도는 민홍기에게 “너희들은 부자이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아니하여 이런 변을 당하는 것이니 이후부터는 특별히 주의하라”고 설교까지 한 후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나 민 자작 가는 즉시 경찰서에 고발하지 않고 그날 오후 6시쯤 비로소 종로경찰서에 고발했다.

이에 종로경찰서 수사대는 이날 밤 8시쯤 청진동 118번지 이봉호의 방에서 범인을 체포해 엄중 취조 중인데 잡고 보니 침입한 강도는 민 자작의 사촌인 남작 민형식의 여섯 째 아들 민병련(26)이었다.

그가 육촌 형제를 협박하여 강도질을 하게 된 요인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내용이 잠재하더라.

민병련의 형 민 모씨의 말에 따르면 “나는 민병석 자작과 친척이지만 벌써 그 집과는 절교한지가 18년이나 되고 그 절교한 원인은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추측할 것이나 아우 병련과 관련된 말만 하자면 재작년 11월 중 민병석 자작의 마름이 되어 충주 사창이라는 곳에 있다가 작년 9월 24일 민 자작으로부터 그 마름 자리를 떼여 할 수 없이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이리저리 셋방 살림을 하고 있었으나 생활이 극히 곤란하여 이번 사건도 그 원인은 분명히 생활 곤란이오 민 자작 집에서 매월 돈이 십 원과 쌀 한 섬씩을 보내지만은 우리 형님들의 가족생활도 못되는 터인 즉 나나 내 아우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하더라.

한편 민병련이 강탈한 물건을 경찰이 압수, 살펴 본 바 단도는 가위의 한 쪽 다리이며 빼앗은 금시계는 이왕전하께옵서 하사하신 것으로 오백여 원의 시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더라(이하 생략·출전 동아일보)
민씨 척족의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 민병석 저택에서 강도짓을 한 민병련. 민병석의 오촌이다. 민병련은 강도짓을 하며 "왜 가난한 사람을 구제 안해"라고 협박한다. 

□ 해설

1929년 4월 15일 여흥 민씨 척족이자 이 집안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 민병석(1858~1940) 저택에 강도가 들었다. 민병석은 당시 민비(사후 명성황후 시호)를 배경으로 동학농민전쟁(1884~1885) 당시 도승지, 호조참판 등을 지냈고 청일전쟁(1894~1895) 때는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평안도 내 광산을 관장하며 청나라 군대와 결탁했는데 일본군이 평양성을 점령하자 도주했다.

1898년에는 군부대신으로 황국협회를 동원 만민공동회를 습격했으며 러일전쟁(1904) 발발 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1904년 3월 조선을 방문한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는 행사를 지휘했다. 그는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건넨 30만 엔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1908년 궁내부대신으로 재임용된 그는 1910년 10월 국권 강탈 때까지 재임했다. 이해 6월에 ‘한국경찰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 체결을 가결시킴으로써 ‘경술국적’으로 지탄 받았다.

이후 행적은 왕실 재산, 농수축산업 및 산업 분야 등 전방위로 개입해 재산을 축적하며 친일 행위를 벌였다. 1933년 당시 30만 원 이상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였으며 그 해 5월 충남 논산에 있는 소유지의 소작인 30여 명의 소작권을 박탈해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민병석(1858~1940). 민복기 전 대법원장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현 광화문사거리 ‘고종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가 휘호가 그의 글씨이다.

이런 그가 서울 경운동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낼 때 친족 간에 불화로 발생한 강도 사건을 수사해 보니 사촌인 민형식(1859~1931·반민족친일행위자) 남작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민형식은 충주목사를 하면서 임오군란 당시 민비의 피신를 호종했다.

이 민 남작은 민병석에 기대 사는 인물이었는데 그가 일찍 죽으면서 아들 형제 여섯은 당숙인 민병석에 빌붙어 살았다. 그들이 허랑방탕해 민병석이 내친 모양이다.

범인 민병련의 형이 “아우 민병련은 보통학교도 못나왔소”하고 억울해 하고 민병석 자작 측에서는 “매달 돈 이십 원과 쌀 한 섬씩을 보냈었다”고 하소연한다.

한편 이 민병석 자작의 아들이 박정희 정권시대 검찰총장과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1913~2007)이다. 그는 인혁당 사건 8명의 피고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들은 하루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그는 ‘사법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