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 화가 박수근, 이처럼 달달한 연애편지

한국 최고 화가 박수근, 이처럼 달달한 연애편지

[전정희 편집위원의 '러브& 히스토리칼 사이트] 화가 박수근 부부와 강원 양구(4)
가난한 청년 화가, 이웃집 신여성에 반해 상사병 들어

기사승인 2022-10-23 06:01:01
1~3회 요약

일제강점기. 보통학교 밖에 못 나온 가난한 화가 박수근과 춘천여고 출신 부잣집 신여성 김복순은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소재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해방되고 남북이 갈리면서 부부는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 군의원과 면의원이 되어 활동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고 부부는 목숨을 위협받는다. 김복순은 우선 남편을 서울로 피난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자신은 인민위원회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감시를 받는다. 김복순은 “여기서 죽으나 탈출해 남편을 만나고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라며 지뢰 깔린 강을 건너 UN연합군 품에 안긴다.
화가 박수근 고향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앞을 흐르는 서천과 담수호 파로호. 2019년 5월 25일 해질녘이다. 사진=전정희
박수근 고향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마을 벽화. 박수근이 즐겨 그렸던 '아기업은 소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2022년 9월. 사진=전정희

그렇다면 가난한 청년 화가 박수근(1914~1965)과 기독교 신여성 김복순(1922~1979)은 어떤 인연으로 만난 걸까.

강원도 양구 출신으로 보통학교도 졸업 못 한 박수근은 열여덟 살에 수채화 ‘봄이 오다’로 제11회 조선미술전(鮮展)에 입선, 천재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어머니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가세는 더욱 기울고 수근이 꿈꿨던 일본 미술학교 유학도 어쩔 수 없이 접게 된다. 수근은 동생들을 데리고 ‘전업주부’ 생활을 해야만 했다.

수근은 도화 연필을 살 돈이 없어 직접 뽕나무 잘라다 목탄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다.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다. 동생 동근은 손재주가 좋아 수상스키, 시계, 라디오 등 못 만드는 게 없었다. 어느 날 동근은 뒷방에서 모형 비행기를 만들었다. 팔아 살림에 보탤 생각이었다.
박수근 작 '봄이 오다'(1932). 박수근이 18세 때 '조선미술전'(선전)에 입선한 작품이다.

박수근의 생전 회고.

“왜놈들이 동생에게 ‘비행기를 만드는 건 간첩들이 하는 짓’이라며 사상범으로 몰았다. 양구경찰서에 찾아가 한없이 면회를 기다렸으나 순사들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동근은 서대문형무소까지 끌려가 징역을 살았다.

결국 수근의 아버지는 이런 저런 일로 빚 갚기도 어려운 신세가 되자 양구 정림리 고향 집을 팔아 금강산 가는 길목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옛 금성 읍내)으로 이사, 시계 수리점을 차린다. 우편소 부근 초가집이었다. 그 초가 윗집이 금성 부자 김복순 집이었다.

복순 집은 해마다 원산에서 생선 부쳐 먹고, 인천에서 조기 짝으로 사 오고, 강릉 감을 현지에서 사와 먹을 정도로 넉넉했다. 그의 아버지는 경기도 포천 사람으로 조실부모했으나 금성에 들어와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복순은 모자란 것 없이 자랐다. 그 당시 신문물의 중심 금성감리교회를 다니며 세련된 여성으로 성장했다. 금성유치원, 금성보통학교, 춘천여고를 졸업했다. 공부는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불행히도 수근처럼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

복순이 이팔청춘이 되자 당연히 좋은 혼처가 들어왔다. 춘천의 병원장 아들이었던 수의사, 철원무진공사의 안정된 월급쟁이 등이 혼처였다. 수의사와의 혼담이 빠르게 오갔다. 신여성이었던 복순은 사실 얼굴도 안 보고 부모가 정하는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때 수근은 춘천에서 사숙 미술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금성 집에 왔다가 복순을 보고 반하고 말았다. 수근이 복순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쪽지를 보냈다. 복순은 기겁했다. 복순보다 두어 살 많은 아버지의 첩실이 쪽지 내용을 장난치듯 읽어주었다.

하지만 이 쪽지 내용이 할머니 귀에 들어갔고 결국 아버지의 불호령으로 이어졌다. “어디 근본도 없는 환쟁이가…”였다. 복순과 첩실은 가정 폭력을 당하고 감금되다시피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병원장 집과의 혼사가 택일 되어 예물이 오가고, 김화 읍내 최고의 가구점에서 신혼살림이 준비됐다.

어느 날이었다. 복순네 집 사랑채에서 대판 싸움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내 아들이 뭐가 못났길래 애를 죽게 만든단 말이오! 우리가 가난하다고 이렇게 업신 여겨도 된단 말이오. 부부가 잘살고 못사는 것은 분복(分福)에 달린 일 아니오. 이대로 내 아들 죽게 할 거요.”
박수근 작 '맷돌질 하는 여인'(1940). 박수근-김복순 결혼 직후 김복순을 모델로한 작품.

시계포를 하는 수근 아버지가 흥분하여 복순 아버지에게 따지고 들었다. 첩실(복순의 작은 어머니)이 복순에게 이 소동을 알렸다. 사실 복순도 수근의 연애편지를 받고 마음이 설레었으나 아버지의 불호령에 순응할 수밖에 없던 터였다.

전편에서 얘기했듯 복순은 아버지의 한량 끼로 얼굴이 늘 어두웠다. 새어머니에 이어 첩실까지 둔 아버지였다. 복순은 늘 사랑이 고팠다. “하나님, 가난해도 좋으니 성실한 남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해주소서.” 그녀의 기도 제목이었다.

위아래 집 소동에 복순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수근은 복순이 병원장 집으로 시집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드러눕고 말았다. 상사병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그의 아버지가 윗집에 쫓아가 거칠게 따진 것이다.

소동 후 복순의 아버지가 그녀를 불러 앉혔다.

“별일이 다 있구나….”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복순의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수심 진 얼굴로 딸을 대했다.

“남의 집 장남이 죽게 내 버려둘 순 없잖니. 너도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네 작은어머니에게 들었다. 딸 하나 가지고 두 사람에게 허락한 모양이 됐지만 어쩌겠니. 아랫집으로 시집갈 생각을 가져라.”

눈가에 물기가 인 아버지의 모습에 복순은 울음이 쏟아지는 걸 억지로 참았다.

“네가 일곱 살에 친모를 잃은 게 마음에 걸렸는데 친 시어머님 사랑이라도 받길 바랐다. 한데 아랫집도 서모이니 마음이 아프구나. 신랑 될 사람도 그림만 그리고 이렇다 할 직장이 없으니...그러나 기왕 내 사위 될 사람이니 네가 어려울 때는 서슴없이 말하거라. 딸이 둘도 아니고 너 하나뿐인데 네가 시집가 배곯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복순도 울었고, 아버지도 울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수근은 벌떡 일어나 “밥 좀 주세요”하고 마구 먹어댔다. 결국 체하여 다시 몸져누웠다. 그럼에도 정신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박수근이 아내 김복순에게 보냈던 연애편지 내용. 박수근 사후 김복순이 연애편지를 묶어 책으로 낼 생각으로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수근은 복순에게 첫 연애편지를 썼다.

‘…나는 보통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암으로 오랜 병원 생활하시다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돌봐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에 다니려던 꿈 또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며 그림 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네 번 선전에 입선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 번 거절하였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앞서 빨래터에서 당신을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약혼 후 편지 중.

‘…나는 당신이 춘천으로 약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고 자부했는데 이처럼 약한 줄이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요. …이번에 서울 가서 당신에게 줄 불란서 자수 수실을 사서 와서 보내니 고운 수를 놓아서 오십시오….’

세 번째 편지 중.

‘…나는 당신이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를 차리려고 고기를 썰다 손을 뭉텅 베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예비 장인)가 엄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뛰어가 내 손으로 당신 손에 약을 발라 드리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은 괴롭기만 합니다. 여기 약을 사서 보내니 잘 바르고 처 매십시오. 속히 낫기를 바라면서.’

네 번째 편지 중.

‘어제저녁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왠지 저녁에 가고픈 생각이 나서 갔었더니 마침 (예비) 장인도 안 계시고 큰 장모님도 안 계셔서 그냥 돌아오려고 했는데 작은 장모님께서 당신이 편도선이 부어 앓아누워 있으니 안방에 들어가 보고 가라고 하시기는 하나, 그러나 장인께서 들어오시면 또 당신을 괴롭힐 것 같아 망설였습니다. 그냥 발길이 안 돌아 서서 당신이 누워 있는 안방에 작은 장모님 안내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예고 없이 들어갔지만 당신이 그토록 당황하고 불안에 떨 줄은 몰랐습니다. …일어나려 했으나 나도 모르게 앉아 있었습니다. …괴로움 받으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제 결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신랑 박수근과 신부 김복순.

두 사람은 1940년 2월 10일 금성감리교회에서 한사연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헤어진 후 아내 김복순의 목숨을 건 북한 탈출로 이어졌다. 간신히 남한에 도착한 김복순은…  <다음 회로 이어짐:매주 일요일 오전 6시 발행>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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