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가 소환한 여자들 [나, (여자)아이들]

‘누드’가 소환한 여자들 [나, (여자)아이들]

기사승인 2022-10-29 06:00:02
배우 매릴린 먼로(왼쪽)와 그룹 (여자)아이들 멤버 민니.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스틸, ‘누드’ 뮤직비디오 캡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가수 로렐라이(매릴린 먼로)는 돈 많은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 파리행 유람선에서 만난 피기(찰스 코번)는 그의 사냥감 중 하나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진 피기는 로렐라이의 아름다움에 이성을 잃는다. 로렐라이는 그를 꾀어 다이아몬드가 박힌 티아라(왕관)를 얻어낸다. 기쁨은 잠시. 티아라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 피기의 아내(노마 바든)는 로렐라이를 도둑으로 여겨 그를 고소한다. 설상가상 소중히 보관한 티아라가 사라져 로렐라이는 법정에 설 위기에 처한다.

1955년 개봉한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감독 하워드 혹스)는 페미니즘 관점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다분한 작품이다. 하지만 극중 로렐라이를 연기한 배무 매릴린 먼로는 오랜 시간 ‘돈만 밝히는 멍청한 금발미녀’로 규정되곤 했다. 단순한 오해나 몰이해가 아니다. 그보다는 여성을 육욕의 대상으로만 보는 적극적인 모욕이자 멸시다. 그룹 (여자)아이들은 지난 17일 공개한 신곡 ‘누드’(Nxde) 뮤직비디오에 먼로를 소환해 존경과 애정을 보내는 한편, 그를 향한 세간의 난폭한 시선을 폭로한다.

월트 휘트먼의 시집을 읽는 (여자)아이들 멤버 전소연. ‘누드’ 뮤직비디오 캡처

월트 휘트먼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을 읽는 소연의 모습 뒤로 ‘그는 섹시하지만 멍청하다’라고 적힌 신문 기사가 지나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먼로는 생전 ‘풀잎’을 비롯해 고전 ‘율리시스’, 심지어 사회주의 금서까지 탐독한 다독가였다. 그러나 대중은 ‘먼로는 도스코예프스키 스펠링도 모를 것’이라며 비웃었다. 소연은 먼로를 섹스 심벌로만 소비하려는 대중의 음흉한 흥미에 “네 시선은 무례해”(your view’s so rude)라고 지적한다. “변태는 너야”라고 쐐기까지 박는다. 데뷔 때부터 (여자)아이들의 음악을 만들어온 그는 “다시는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일 것”(MBC ‘나 혼자 산다’)이라는 메시지를 먼로의 일생을 빌려 노래한다.

민니와 우기가 연달아 부르는 “그럼 다이아 박힌 티아라 하나에 내가 / 퍽이나 웃게 퍽이나 웃게”라는 구절도 인상적이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속 티아라 에피소드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구절은 금발은 사치스럽다는 오독에 일격을 날린다. 영화에서 로렐라이가 다이아몬드를 탐하는 이유도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노래 ‘다이아몬드는 여자들의 친구’(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에서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남자들은 차가워지지만 다이아몬드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제한된 시대를 직격하고 여성의 젊음과 아름다움에만 가치를 두는 남성들을 비꼬는 가사다. 민니는 ‘누드’ 뮤직비디오에서 ‘다이아몬드는 여자들의 친구’를 부르는 로렐라이의 모습을 오마주했다.

(여자)아이들의 모습이 영화 ‘물랑루즈’ 속 뮤지컬 배우들과 비슷하다. ‘누드’ 뮤직비디오 캡처

(여자)아이들은 먼로와 로렐라이를 되살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다섯 멤버가 붉은 무대에서 쇼걸 차림으로 춤추는 장면은 영화 ‘물랑루즈’(감독 바즈 루어만) 속 ‘레이디 마말레이드’(Lady Marmalade) 공연을 떠오르게 한다. 이 영화 주인공 샤틴(니콜 키드먼)은 예술적인 영혼을 가진 배우 지망생이다. 하지만 극장주(짐 브로드벤트)에게는 아름다운 외모로 공작(리차드 록스버그)을 유혹해 후원금을 뜯어낼 도구로 취급당한다. ‘누드’가 오페라 ‘카르멘’의 아리아 ‘하바네라’를 인용한 사실도 흥미롭다. 주인공 카르멘은 자유롭게 사랑하는 집시였지만, 남자를 파멸시키는 요부라는 오명을 썼다. (여자)아이들은 외설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가두려는 시도를 통렬하게 꼬집고, 여성들이 스스로 정의한 정체성을 존중한다.

‘누드’ 뮤직비디오는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가 분쇄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영국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가 자신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를 분쇄한 사건을 오마주했다. 뱅크시는 예술이 자본에 잠식돼 과시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비판하고자 분쇄 퍼포먼스를 벌였다고 알려졌다. (여자)아이들은 관음적 시선에 대한 날선 비판 의식에 ‘탈(脫) 프레임’의 의미를 더한 듯하다. 소연이 데뷔 때부터 반복해온 “틀을 깨고 싶다”던 발언과 분쇄된 채 액자 바깥으로 빠져 나오는 누드화가 중첩되는 장면이 겹치며 해방감을 준다. 소연은 17일 진행된 컴백 기념 공연에서 “‘누드’는 벗겨진 상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라며 “우리를 둘러싼 선입견을 빼고 진짜 본연의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뮤직비디오에 담았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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