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으로 월즈 인터뷰 진행 여부는 경기 시작 전 결정이 난다. 패전의 실망감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울 선수를 인터뷰하는 게 내키지는 않았다. 나는 경기장 내부 한편에 마련된 인터뷰 룸에 앉아 김혁규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혁규가 동료 ‘킹겐’ 황성훈과 룸으로 들어섰다. 인터뷰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가죽 소파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옅은 미소가 간간히 둘의 얼굴을 스쳤다. 나는 다소 안도했다.
이내 김혁규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당시 그는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남은 일정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팀원 간의 결속만 무너지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우승권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강조했다.
“오늘 지긴 했지만 우리끼리만 무너지지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몇 승 몇 회 전승 이렇게 올라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끼리 열심히 배워서 우승권에 가까운 경기력을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 “로그가 오늘 되게 잘 가르쳐 준 것 같다. 오늘을 토대로 우리끼리 더 단단해질 수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
조목조목 답변하는 김혁규의 표정이 사뭇 밝아서, 나는 반가우면서도 다소 의아했다.
그간 현장에서 보아 온 김혁규는, 패배를 몹시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선수였다. 강도 높은 연습과 훈련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프로 생활을 해온 그다. 지난 8월 현장에서 만난 김혁규는 자신의 이러한 성향에 대해 “힘들지 않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사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더 힘든 것 같다. 마음도 불편하고 뭔가 변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싫다”고 전한 바 있다.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하기도 했다.
‘표정이 밝다, 월즈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김혁규는 미소를 띠면서 “사실 되게 분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게 되면 팀에게 손해라고 생각한다. 최대한 잘 추슬러 경기 준비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 경기에 대한 부담감이 더 생겼지만 다음 경기에 지더라도 나는 충분히 우리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김혁규가 자신을 옥죄어 온 무엇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 앞에 놓인 숨 막히는 경쟁을 즐기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선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김혁규와 DRX가 이번엔 정말 큰일을 저질러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 김혁규의 말을 정리했다. 그가 인터뷰에서 강조했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홀린 듯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썼다. 김혁규와 DRX는 이후 8강과 4강을 거쳐 우승을 차지했다. 세간의 예상을 뒤집은 ‘언더독의 반란’이자 ‘기적의 여정’이었다.
김혁규와 DRX의 여정은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시련에도 마음만 꺾이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꿈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덕분에 서적에서 흔히 볼 법한, 지극히 평범한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장도 생명을 얻었다.
김혁규는 우승 직후 해외 매체와 인터뷰에서 “포기할 수 없었던 게, 언제부턴가 내가 많은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상도 들었고 나이도 들어가면서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나 몇 년째 성취 없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자기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 왔다”고 전했다. 자신의 개인 SNS에는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썼다.
정말이지, 김혁규 만큼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선수는 드물다.
LoL e스포츠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김혁규는 유독 월즈와는 연이 없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우승을 향해 도전했다. ‘데뷔 이래로 매일 이 자리에 서는 걸 상상’하며 나아갔다. 거듭되는 부상과 부진, ‘데프트는 끝났다’라는 세간의 손가락질에도 목표를 향한 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스스로를 다잡은 선수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에게서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장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문대찬 기자 mdc05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