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고 미스터리한 엘리트 형사(JTBC ‘괴물’), 귀신 전용 호텔을 관리하는 지배인(tvN ‘호텔델루나’), 위태로운 조선의 왕과 그를 꼭 닮은 광대(tvN ‘왕이 된 남자’). 배우 여진구가 지난 몇 년간 브라운관에 펼쳐놓은 인물들이다. 2005년 데뷔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배우로 산 그는 유독 일상적인 캐릭터와 연이 닿지 않았다. KBS2 ‘오렌지 마말레이드’와 tvN ‘서클: 이어진 두 세계’에서 평범한 학생을 연기했지만 흥행하진 못했다. 그래서일까. 여진구는 늘 청춘 로맨스에 갈증을 느꼈다. 그가 영화 ‘동감’(감독 서은영)에 출연한 이유다.
지난 9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여진구는 “주변에서 축하를 많이 받았다”며 웃었다. “VIP 시사회에 온 선배들이 시기적절하게 청춘 로맨스를 만나서 잘됐다고 말해줬어요. 흥행과 관계없이 이런 사랑스러운 작품을 한 것만으로도 축하한다고요.” ‘호텔 델루나’에서 함께 호흡한 가수 겸 배우 아이유(이지은)와 동갑내기 친구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정국 등도 시사회에서 영화를 미리 보고 ‘잘 봤다’ ‘귀엽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여진구는 ‘동감’에서 1999년을 사는 한국대학교 95학번 남학생 김용을 맡아 배우 김혜윤과 풋풋한 로맨스를 선보인다. 그는 “용은 낭만을 가진 인물이다.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이 용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라며 배역에 애정을 드러냈다. 사랑에 한껏 울고 웃는 용과 달리, 여진구는 그간 사랑보단 일을 우선했다고 말했다. “‘동감’을 촬영하며 제 첫사랑과 짝사랑이 떠올랐어요. 왜 저는 사랑과 일을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또다시 기회가 찾아오면 다르게 행동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모르겠어요, 어떻게 될지. 하하.”
1997년생 배우는 세기말 분위기에 녹아들려 부단히 노력했다. 1990년대 영상 자료를 보며 서울 방언을 입에 붙이고, 당시 유행한 힙합 스타일 의상을 찾아 입었다. 안테나가 박힌 휴대전화나 햄무전기 등 난생처음 보는 소품에 눈이 동그래지기도 했다. 옛 분위기에 흠뻑 빠진 덕분일까. 요즘 여진구는 필름 카메라와 LP 턴테이블을 수집한다고 한다. 디지털 세대의 남다른 아날로그 사랑이다. 그는 “1990년대, 2000년대를 동경해서 그 시기에 나온 한국 영화도 즐겨봤다”고 했다.
여진구는 ‘동감’ 결말에서 40대 중반의 모습으로도 깜짝 등장한다. “용이 어떻게 자랐을지 상상”하며 감독과 상의한 끝에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특수분장을 받았다. 그는 “용이 절절하게 첫사랑을 했지만, 결국 좋은 인연을 만났을 거라고 봤다. 20대 청년에게 마음 써줄 여유도 생겼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여진구도 종종 자신의 미래를 상상한다. 18년차 중견 배우인 그는 “연차를 더 쌓고 인연도 더 많아지면 후배 배우들과 영화 꿈나무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해보고 싶다”며 “아직은 막연한 꿈”이라고 말했다.
“제가 보여주고 싶은 연기와 관객이 제게 기대하는 연기가 다를 수 있어요. 제가 어떤 역할을 연기했을 때 가장 잘 이해받고 응원받는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해요. 감사하게도 저는 장르물이나 사극에 출연했을 때 좋은 반응을 받았어요. 제겐 그게 무기이자 다른 장르에 도전할 수 있는 토대예요. 한 장르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며 제 장르를 넓히고 싶어요. 끊임없이 두드리면 결국엔 칭찬받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