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 직업이 뭐지 싶어요. 차에 타면 옆에 축구공과 축구화가 있어요. 그 옆엔 야구 배트와 야구 글러브, 그 옆에는 사격용 총, 그 옆에는 골프채….” 운동선수의 말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코미디언 김민경은 운동 예능에서 활약 중인 근황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20년 1월 코미디TV 웹 예능 ‘오늘부터 운동뚱’(이하 운동뚱)에서 제대로 운동을 시작하며 연예계 대표 ‘근수저’(근력을 타고났다는 걸 일컫는 신조어)로 떠올랐다. ‘운동뚱’ 시작 2년 11개월 만에 국제실용사격연맹 사격 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희극인으로 산 지 14년, 나이 만 41세에 새 적성을 찾은 셈이다.
김민경이 ‘근수저’로 두각을 드러낸 건 ‘운동뚱’ 제작발표회부터다. 아령을 들지 못한 사람이 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복불복 게임. 현장에 함께한 남자 코미디언들이 저마다 아령을 든 그때, 김민경 역시 아령을 들어 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아령이 붙어있는 테이블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테이블은 성인 남성 둘이서 옮길 정도의 무게였다. 운동을 하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들어 올렸단다. “운동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며 PD에게 애걸복걸하던 그는 ‘운동뚱’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헬스장에선 덤벨 340㎏을 레그 프레스로 거뜬히 들어 올렸고, 킥복싱 첫 도전부터 발차기 한 번에 관장을 멀리 날려버렸다. 대중은 김민경에게 ‘체육 대신 제육을, 운동 대신 우동을, 사격 대신 삼겹을 선택한 불백 위도우’라는 별칭을 붙였다. 과거엔 상처받기 싫어 댓글을 보지 않던 그는 이제 자신을 응원하는 댓글을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운동으로 용기를 얻은 김민경은 ‘운동뚱’을 시작한 해 언론과 인터뷰에서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던 운동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사람은 무엇이 맞고 무엇이 잘될지 모른다는 걸 느꼈다. 누구에게든 기회는 꼭 온다”고 말했다.
김민경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건 그가 걸어온 길을 모두가 알아서다. 극단 생활을 거쳐 2008년 KBS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그는 여러 코너를 통해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뚜렷한 유행어를 만들거나, 이름 석 자를 확실히 각인시키진 못했다. 방송인으로 조용히 활동하던 그는 코미디TV ‘맛있는 녀석들’로 첫 전환점을 맞는다. 그렇게 코미디 일변도를 걷다가 뜻밖에도 운동으로 주목받았다. 평범해 보이던 사람이 뜻밖의 재능으로 빛을 보는 이야기.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다.
대중이 반응한 감동 드라마는 최근에도 있었다. KBS1 ‘전국노래자랑’의 새 진행자로 발탁된 김신영이 그렇다. 2003년 SBS ‘웃찾사’로 데뷔한 그는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과 예능에서 활약해왔다. 걸출한 입담과 콩트 실력으로 인기를 끌던 김신영. 건강을 위해 체중을 감량하며 포동포동한 기존 캐릭터를 잃자 설 곳이 줄었다. 라디오 DJ에 주력해 활동하던 그는 동료 희극인들과 그룹 셀럽파이브를 결성해 가수로 발을 넓혔다. ‘부 캐릭터’ 열풍일 땐 다비 이모라는 새 캐릭터를 내세워 끼를 펼쳤다. 올해 영화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을 통해 정극에 도전한 그는 생활감이 느껴지는 연기로 호평을 얻었다. 오는 25일 열리는 제43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다. 여기에, 일요일의 딸을 자처하며 고 송해를 이어 ‘전국노래자랑’의 새 얼굴로 나섰다. 제작진은 김신영을 발탁한 이유에 대해 “시청자 친화력이 뛰어나고 출연자와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희극인이기 때문”이라면서 “김신영이 여러 분야에서 애쓴 덕”이라고 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이들의 모습은 대중에게 감동을 준다. 이들의 성취에는 그동안의 인내와 노력이 고스란히 담겼다. 무엇이든 버텨온 이들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때로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유튜브 예능으로 트렌드에 발맞춰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박미선이 대표적이다. 박미선은 구독자 59만명(18일 기준)을 거느린 스타 유튜버다. 1988년 데뷔해 정상에도 올라봤지만, 결코 과거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방송계가 인간 박미선이 아닌 이봉원과 결혼한 박미선만을 찾거나 코미디언 박미선이 아닌 남편 험담하는 아줌마로 소구할 때도,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 길을 찾기 위해 애써왔다. 과거 출연했던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가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재조명되고 ‘밈’으로 떠오르자 박미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즘 세대들과 소통에 뛰어들었다.
박미선은 숱한 방송에서 ‘젖은 낙엽 정신’을 설파해왔다. 낙엽이 젖으면 사물에 꼭 붙어 있듯이, 한 분야를 꾸준히 이어가는 게 쉽지 않아도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기회는 온다는 지론이다. 박미선은 3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다. “2인자면 어때요. 결국 돌아봤을 때 인생을 완주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젖은 낙엽 정신으로 바닥에 바짝 붙고, 고개는 하늘을 쳐다보세요. 그리고 천천히 버티는 거예요.” “여성 예능인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조금만 빈자리가 있으면 비비고 들어가서 앉아야 합니다. (중략)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해요.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거기에 열정적으로 미쳐보면 또 다른 일들이 생겨요.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박미선뿐이 아니다. 살아남은 김신영은 마침내 전 국민이 사랑하는 프로그램의 간판이 됐고, 해외 시상식을 휩쓴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조용히 견뎌온 김민경은 자신도 모르던 재능을 발견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버티던 이들에게 주어진 성공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동력이 된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돌아간다. 조금 느릴지라도 순조롭게.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