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모두가 진보진영 후보의 단일화를 예상하던 그때, 열 살 남짓한 소년이 맹랑하게 묻는다. “그 두 사람이 단일화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보세요?” 소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부다비행 비행기 폭파사건도 예측한다. JTBC 금토일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후반을 그린 이 드라마는 김영삼·김대중 단일화 결렬과 KAL기 폭파사건, 1997년 외환위기 등 한국 현대사를 촘촘히 담아내 호평받고 있다. 역사적 사실만 고증한 게 아니다. 작품 속 재벌가 이야기도 어딘가 낯익다. ‘재벌집 막내아들’과 판박이인 그때 그 사건을 쿠키뉴스가 살펴봤다.
“초밥 밥알이 몇 개고”
드라마: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순양그룹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회갑연. 초밥을 맛보던 진양철이 주방장에게 대뜸 묻는다. “몇 개고? 밥알 말이다. 몇 개고?” 주방장은 “생선과 밥양 모두 15g을 정량으로 하고 있다”고 답하지만 진양철은 성에 차지 않는 눈치다. 그는 “훈련된 초밥 장인이 한 번 초밥을 쥘 때 보통 밥알이 320개”라고 대신 답하더니 덧붙인다. “점심에는 320개가 적당하다 캐도, 오늘 같은 날이나 술과 같이 낼 때는 280개만 해라. 배 안 부르구로!”
현실: ‘재벌집 막내아들’ 2화에 나온 이 에피소드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일화와 똑 닮았다. 때는 1979년경. ‘초밥에 관한 한 내가 한국 최고’라고 자부하던 이병환 당시 신라호텔 조리부장은 호암으로부터 밥알 개수가 몇 개냐는 질문을 받고 진땀을 뺐다. 이 조리부장은 “생선 무게 15g, 밥 무게 15g이라고 배웠으나 밥알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며 초밥을 풀어 밥알을 셌고, 마침내 “초밥 한 점에 밥알이 320개”라는 답을 내놨다. 호암은 “점심에는 식사용으로 초밥을 먹으니까 한 점에 320알이 맞고, 저녁에는 술을 곁들여 안주로 많이 먹으니까 280알이 적당하다”고 훈수를 뒀다.
“반도체 사업이 미래 먹거리”
드라마: 진양철은 반도체 사업을 키우고 싶다. 기술력은 미국이나 일본에 한참 못 미치지만 “반도체 사업이 우리 순양의 미래 먹거리”라고 믿는다. 과정은 험난하다. 순양반도체가 막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을 해외 경쟁사들이 싸게 팔기 시작해서다. 반도체 사업에 도전한 또 다른 한국 기업 영진반도체도 백기를 들었다. 아들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라며 반기를 든다. 그러나 진양철은 포기를 모른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지 않을 만큼 새우 몸집을 키워야 이길 수 있다”는 손자 진도준(김강훈) 조언에 따라 영진반도체를 인수하고 사업에 박차를 가한다.
현실: 반도체는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이 회장은 1974년 부도 위기에 놓인 한국반도체를 개인 자금으로 인수했다. 주변의 비관에도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며 핵심 인재를 영입하는 등 반도체 사업에 공을 들였다. 일명 ‘도쿄 선언’으로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한 1983년 삼성은 64K 램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극중 설정처럼 이듬해 선발주자인 미국과 일본이 덤핑 경쟁으로 고래 싸움을 벌이면서 삼성도 1200억원에 달하는 적자를 떠안았다. 호암과 이 회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술 개발을 이어갔고 생산라인도 늘렸다. 이는 훗날 삼성전자가 메모리 부문 매출 세계 1위에 올라서는 기반이 됐다.
“재계 영원한 라이벌, 순양과 대영”
드라마: 반도체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던 진양철은 자동차 산업에 눈독을 들인다. 부도 직전인 한도제철을 거금으로 인수해 계열사인 순양자동차를 키우려고 한다. 이런 진양철에게 대영그룹 주영일(이병준) 회장은 눈엣가시다. 이미 한국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은 데다 자동차를 향한 자신의 열망을 “돈 많은 노친네 호사 취미 생활” 따위로 여겨서다. 진도준(송중기)은 주 회장을 “한국전쟁 당시 맨주먹으로 월남해 재계 서열 1위 대영그룹을 일궈낸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했다.
현실: 이북에서 태어난 ‘흙수저’ 출신 사업가. 고급 양복 대신 개량 한복이나 회사 점퍼를 즐겨 입는 소박한 취향. 주영일에게서 현대그룹 창업주인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 느낌이 진하게 풍긴다. 강원 통천군에서 태어난 아산은 부모처럼 가난한 농사꾼이 되기 싫다며 일찍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현대그룹을 일궈냈다. 극 중 진양철과 주영일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끈 쌍두마차이자 재계의 영원한 라이벌”로 묘사됐듯, 아산과 호암도 재계 숙명의 라이벌로 불리곤 했다. 순양그룹이 인수한 한도제철은 외환 위기 방아쇠를 당겼다고 평가받는 한보철강공업과 닮은꼴이다. 아진자동차 인수 에피소드는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합병을 떠올리게 한다.
“장자승계? 지금이 조선도 아니고…”
드라마: 퇴직을 바라보는 진양철은 아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지만 영 마뜩잖다. 큰아들 진영기(윤제문)는 그룹을 이끌기에 너무 유약하고, 둘째 진동기(조한철)는 판단력이 못 미덥다. 그렇다고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와 결혼하더니 집안과 연을 끊은 막내 진윤기(김영재)에게 회사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 아버지 기대를 채우고 싶은 진영기는 무리해서 한도제철을 인수하고, 진동기는 “장자승계. 지금이 뭐 조선시대도 아니고. 경영 능력 입증한 사람이 승계받아야 하지 않겠나”라며 경쟁사인 대영그룹과 손을 잡는다. 한편 진양철은 현성일보와 혼맥을 맺을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당사자인 진성준(김남희)과 모현민(박지현)은 다른 생각을 품은 눈치다.
현실: 순양그룹 후계 자리를 둘러싼 진영기와 진동기의 기 싸움은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삼성그룹 경영권 다툼과 유사하다. 호암의 장남 이맹희 CJ 명예회장은 한때 17개 주력 계열사 임원으로 활약하며 후계자로 입지를 다졌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때는 삼성그룹 경영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호암은 이 명예회장의 경영실적을 낮게 평가해 경영에서 배제했다. 부친에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진영기와 비슷한 모습이다. 호암 둘째 아들 故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은 부친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진동기와 닮았다. 이 전 회장은 ‘사카린 밀수 사건에 이병철 회장이 관여했다’고 청와대에 투서했다가 부친 눈 밖에 났다. 순양그룹과 현성일보 사이 혼담은 삼성그룹과 중앙일보의 혼맥을 연상시킨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