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길이 역사, 벤투호가 한국 축구에 남긴 것 [월드컵]

걸어온 길이 역사, 벤투호가 한국 축구에 남긴 것 [월드컵]

기사승인 2022-12-14 06:00:02
지난 7일 귀국해 감사 인사를 전하는 파울루 벤투 감독. 사진=임형택 기자

파울루 벤투 감독과 한국 축구대표팀의 길었던 여정이 마무리됐다.

벤투 감독은 13일 오후 11시50분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하는 두바이행 항공편을 통해 출국했다. 이로써 벤투 감독과 한국 축구의 동행은 마무리됐다.

벤투 감독은 2018년 8월 한국 축구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4년 4개월간 한국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다. 임기 기간 내내 비판 여론에 부딪혔지만, 자신의 색깔을 녹여내 한국 축구대표팀의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벤투 감독은 한국에서 57경기를 지휘하는 동안 35승 13무 8패의 성적을 기록해 한국 축구 역사상 최장기간 및 최다승을 올린 사령탑으로 남게 됐다.

지난해 11월 아랍에미리트와 지역 예선에서 황희찬의 득점 후 세리머니를 하는 황인범(왼쪽), 김민재, 황희찬.    대한축구협회(KFA)

김민재·황인범·황희찬…대표팀 중심이 된 96라인

2019년까지 대표팀은 기성용(FC서울), 구자철(제주 유나이티드) 등 1989년생이 중심축을 꾸렸다. 하지만 이들이 다소 이른 나이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세대들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김민재(나폴리), 황인범(올림피아코스), 황희찬(울버햄튼) 등 1996년생들이 벤투 감독의 지휘 아래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거듭났다. 

이 가운데 황인범은 벤투 감독을 만나 급성장한 케이스다. 황인범은 ‘포스트 기성용’이라 불리면서 벤투 감독의 신임을 받았지만, 대표팀에서 그의 활약은 미비했다. 당시 소속팀인 밴쿠버에서 맹활약을 이어갔지만 대표팀만 오면 그는 작아졌다. 이에 ‘벤투 감독의 양아들’이란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대회에서 MVP를 차지하는 등 대회 우승의 일등공신으로 떠올랐고, 대표팀에서도 없어서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4경기 모두 선발 출전해 자신의 기량을 입증했다.

김민재와 황희찬 역시 대표팀의 핵심 자원으로 매김했다. 김민재는 포르투갈을 제외 3경기에 모두 나서 대표팀의 수비진을 지켜냈고, 황희찬은 포르투갈전에 교체 출전해 한국을 16강으로 이끄는 극적인 결승골을 작렬했다. 이밖에도 나상호(FC서울)는 황희찬이 나서지 못한 우루과이전에서 선발 출전해 적극적인 수비 가담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던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도 했다.

4년 후인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도 이들은 대표팀의 중추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4년 후에는 한국 나이로 31살로 기량이나 경험 면에서 봤을 때 전성기를 맞이한다. 다음 월드컵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지난 3일 브라질과 16강전에 나선 벤투호의 베스트 일레븐.   대한축구협회(KFA)

강팀을 상대로 보여준 ‘우리의 축구’

벤투 감독은 감독 선임 기자회견에서 “볼을 점유하고, 경기를 지배하고, 기회를 많이 창출하는 축구를 하고 싶다. 90분 동안 끊임없이 뛰면서 강한 면모를 보이는 정체성을 갖추고 싶다”고 비전을 제시했다. 

벤투 감독의 지향점은 후방부터 공을 잡고 경기 주도권을 잡는 ‘프로 액티브 풋볼’, 일명 빌드업 축구였다. 하지만 그동안 늘 수동적이고, 강팀을 상대로 수비 지향적인 축구를 해왔던 한국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스타일이란 지적이 따랐다.

실제로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상대적 약팀인 아시아권 상대로는 통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유럽·남미 팀 등 세계적인 강호들을 상대로는 고전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상대팀의 강한 전방 압박에 한국은 어려운 경기를 펼치곤 했다. 

특히 지난해 3월에는 일본과 평가전에서 0대 3으로 패배하자 “벤투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보수적인 선수 기용과 유연하지 못한 전술 등도 비난 여론에 불을 지폈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KFA) 회장이 이례적으로 사과문을 발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선수들도 “벤투 감독의 스타일을 믿는다”고 지지했다.

벤투호의 스타일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끝내 빛을 발했다. 이번 대회의 다크호스로 평가 받은 우루과이와 1차전에서 접전 끝에 0대 0으로 비겼다. 세계적인 선수인 페데리코 발베르데(레알 마드리드)와 로드리구 벤탄쿠르(토트넘) 등이 있는 우루과이의 중원에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가나와 2차전에서 2대 3으로 패배했지만, 포르투갈과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후반 추가시간 황희찬의 결승골에 힘입어 2대 1로 역전승해 16강 무대를 밟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후 12년 만의 원정 16강 진출을 이뤘다. 비록 16강에서 브라질에 1대 4로 패배하며 여정을 마쳤지만, 벤투호의 빌드업 축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벤투호가 이뤄낸 성과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축구 통계 전문 사이트인 옵타에 따르면 한국은 이번 월드컵 4경기 동안 평균 점유율을 48.3%를 기록했는데, 이는 지난 대회인 러시아 월드컵(37.3%)와 비교해 11% 오른 수치다. 또 경기당 패스 성공 횟수는 264회에서 405회로 53.4%, 파이널 서드 구역 내 볼 터치 횟수는 106회에서 168회로 58.5% 가까이 올랐다.

16강전에서 대패했지만, 대표팀 선수들은 이번 월드컵 결과에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부주장인 김영권은 “과거에는 허무하게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는데, 이번엔 한국이 상대 팀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16강에 오를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팀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지난 7일 귀국 현장에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파울루 벤투 감독. 사진=임형택 기자

벤투가 보여준 것처럼…다음 감독에게도 철저한 시간을

한국 축구대표팀 사령탑은 벤투 감독 시대 전에는 ‘독이 든 성배’와 같았다.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경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의 홍명보 감독과 2018 러시아 월드컵의 신태용 감독은 이전 감독이 경질돼 뒤늦게 투입된 소방수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도 되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팀은 어수선했고, 한국만의 무기를 갖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예외적으로 벤투 감독만이 4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활동했고, 이는 한국이 12년 만에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제 벤투 감독과 결별한 대한축구협회(KFA)는 차기 사령탑 선임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일각에선 차기 사령탑을 국내 지도자로 낙점했다는 소문이 나왔지만 결정된 것은 전혀 없다. 국내뿐 아니라 외국인 지도자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검토할 예정이다. 새로운 감독 선임은 내년 2월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벤투 감독이 4년 4개월의 시간 동안 한국 축구를 바꿨던 것처럼 장기적인 구상과 전략을 펼칠 수 있는 뚝심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KFA도 축구팬들도 다음 지도자가 자리를 잡을 동안 믿고 기다려야 한다.

김찬홍 기자 kch0949@kukinews.com
김찬홍 기자
kch0949@kukinews.com
김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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