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고 자란 19세 소녀 아질리는 강간 생존자다. 6세 때 성폭력을 당한 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트라우마의 늪에 빠졌던 그는 국제인권단체 저스티스 데스크(The Justice Desk·이하 TJD)를 만나고 달라졌다. TJD가 운영하는 음보코도 클럽에 참여하며 사랑과 존중을 배웠다고 했다. TJD를 설립한 인권 운동가 제시카 듀허스트는 아미(그룹 방탄소년단 팬덤)이기도 하다. 그는 RM이 2018년 유엔총회 행사장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한 말에 영감을 받아 음보코도 클럽을 꾸렸다. 클럽은 젠더 기반 폭력 생존자들의 트라우마 극복을 돕는 정신 건강 상담과 자기방어 훈련을 지원한다.
RM 연설 영감 받아…젠더 폭력 피해자 지원하는 음보코도 클럽
방탄소년단이 인기 스타를 넘어 세계적인 현상으로 주목받은 배경엔 팬덤 아미가 있었다. 이들은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공동체’라는 유대감을 토대로 각종 정치·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BTS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17일 서울 삼성동 슈피겐홀에서 열린 2022 머쉬룸 인사이트 포럼은 아미 등 팬덤이 가진 국제시민으로서의 미덕과 영향력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포럼에 참석한 듀허스트는 “방탄소년단에게서 ‘너와 나는 연결돼 있다’는 우분투 정신을 봤다”며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약자이지만 싸울 준비를 마쳤다. 트라우마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해결 못 할 일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듀허스트는 2013년 TJD를 설립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잠비아 등 아프리카대륙 10개국에서 인권 운동을 펼치며 200만명 넘는 시민들 삶에 영향을 줬다. 젠더 기반 폭력 관련 법 개정에 앞장서고 강간 피해자와 협력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지만, 끔찍한 범죄를 목격하고 목숨을 위협받기도 하며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한다. 그때 우연히 방탄소년단의 노래 ‘낫 투데이’(Not Today)를 듣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세상 모든 약자를 향해 ‘우리가 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노래다. 이런 듀허스트를 위해 전 세계 아미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음보코도 클럽 설립 자금을 기부하고 일부는 봉사 활동도 펼쳤다. 아미 네트워크를 통한 연대는 젠더폭력 피해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듀허스트는 “음보코도 클럽으로 2000명 넘는 여자아이들의 삶이 바뀌었다”며 “향후 아프리카 전역의 다른 10개국으로 프로젝트를 넓힐 계획”이라고 했다.
아미에게서 새로운 미래를 보다
아미의 활동 영역은 국경을 넘나든다. 지난해 방탄소년단이 UN본부 연설에서 젊은 세대를 “웰컴 제너레이션”(변화를 반기며 전진하는 세대)이라고 표현한 뒤, SNS에선 해시태그‘#GotARMYRightBehindARMY’(아미 뒤엔 아미가 있다)가 번졌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대유행으로 단절된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10·20대 아미를 위해 선배 아미가 자발적으로 재능을 기부하는 운동이었다. 2020년 흑인 인권 운동 BLM이 번졌을 때나 2019년 아마존 열대우림 곳곳이 숯 더미가 됐을 때도 아미는 해시태그로 뭉쳐 모금 활동을 벌였다. 브라질, 필리핀, 홍콩, 미얀마 등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곳 어디서든 방탄소년단의 음악이 투쟁가로 불렸다. “아미는 대안적 현실을 상상하고 실행한다”(이지영 한국외국어대 세미오시스 연구센터 HK연구교수)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 10월 부산에서 열린 2030부산세계박람회(부산엑스포) 유치 기원 콘서트에서도 아미는 미래 시민공동체의 역할모델을 제시했다. 아미 70여명으로 이뤄진 ‘팀 아미’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공연 개최 장소가 일광 특설무대로 결정되자 현장에서 벌어질 안전사고를 우려해 자발적으로 봉사단을 꾸렸다. 공연장을 답사해 정보를 공유하고 부산시 등 행정기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하는 등 안전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책을 탐색했다. 인근 숙박업소가 숙박비를 일제히 올렸을 땐 소비자보호원과 한국관광공사에 신고를 독려하는 한편 비영리 대안숙소를 제안하기도 했다. 공연장이 사직 아시아드 주경기장으로 바뀐 뒤에는 안전 확보와 불편 해소에 초점을 맞춰 4개 국어로 안내 책자를 제공하고 부스도 열었다. 팀 아미에서 활동한 A씨는 “아미는 아미가 지킨다는 모토로 시작한 활동”이라며 “우리가 아미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뭔가를 만들었다고 느낀다. 순수한 마음으로 활동한 경험이었다”고 돌아봤다.
이지영 교수는 “아미는 인권, 생명, 환경을 지키기 위해 여러 활동을 벌이면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더 나은 방식을 연습하고 있다. 연대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확인하며 목격하기도 했다”면서 “팬덤 활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민주주의에 훨씬 더 넓고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짚었다. 김덕진 미래사회 IT 연구소 소장은 “온라인에서 팬덤의 연관어로 ‘선한 영향력’ ‘품격’ 같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팬덤의 영향력은 산업적 가치를 넘어 세계를 보는 시각을 바꿀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번 포럼은 콘텐츠 비즈니스 팬덤 플랫폼인 페스티버를 통해 펀딩으로 진행했으며 순익은 TJD에 기증할 예정이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