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좋아하세요?”
만화 ‘슬램덩크’ 1권에서 채소연이 건넨 질문에 독자들이 33년 만에 다시 답하기 시작했다. ‘슬램덩크’를 원작으로 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지난 4일 개봉하면서다. 전국 고등학교 농구대회 북산고와 산왕공고 경기를 다룬 이 작품은 봉인된 추억을 기어이 해제해 “단호한 결의”(원작 만화 속 안 감독의 대사)를 되살린다. 영화 인기에 힘입어 원작 만화도 서점가 판매 순위를 역주행 중이다.
10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슬램덩크’는 이날 누적 관객수 46만명을 돌파했다. 2021년 1월 개봉해 누적 관객 218만명을 기록한 영화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감독 소토자키 하루오·이하 귀멸의 칼날)보다 흥행 속도가 빠르다. ‘귀멸의 칼날’은 개봉 5일 차까지 관객 20만6000여명을 모았다. 관객 사이에선 “‘슬램덩크’와 함께 청춘을 보낸 이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네이버 hy2o****), “첫사랑한테 평점 4.5점을 주는 바보는 없어”(왓챠 석미*) 등 호평이 쏟아진다.
3040 남성이 주도한 ‘슬램덩크’ 돌풍
돌풍을 주도하는 이들은 학창시절 한 페이지에 ‘슬램덩크’를 끼워둔 3040세대. 10일 기준 CGV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예매한 관객 중 30대가 44%로 가장 많았고, 40대는 35%로 그 뒤를 따랐다. 성별로는 남성 관객이 전체의 63%로 과반을 넘겼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홍보사 이노기획 관계자는 “원작을 즐겨 본 30·40대 남성 관객들이 개봉 직후 흥행을 견인했다. 최근에는 입소문이 많이 퍼져 부모가 자녀와 함께 관람하는 등 가족 단위 관객도 늘었다”고 귀띔했다.
더빙판으로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많은 점도 특징이다. 이노기획 관계자는 “더빙 퀄리티가 좋은 데다가, SBS에서 1998년과 1999년 방영한 TV 만화영화판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 더빙판도 인기”라고 했다. TV 만화영화판에서 강백호의 목소리를 연기했던 성우 강수진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도 강백호를 맡았다.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로 시작하는 TV 만화영화판 오프닝 곡이 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이 곡을 부른 가수 박상민은 12일 메가박스 코엑스관에서 짧은 라이브 공연을 선보인다.
영화가 불 지핀 인기는 서점가로도 번졌다. 영화 개봉을 맞아 출간된 특별판 ‘슬램덩크 챔프’는 새해 첫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고 예스24는 설명했다. 교보문고 온라인 쇼핑몰 만화 부문에서도 ‘슬램덩크’가 베스트셀러 상위 10개 중 7개를 차지했다. ‘슬램덩크’ 판권을 가진 출판사 대원씨아이는 극장판 영화 제작 과정을 담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 리소스’를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수입사 에스엠지홀딩스는 오는 26일부터 다음 달까지 더현대 서울과 더현대 대구에서 팝업스토어를 연다.
20세기판 ‘꺾이지 않는 마음’
‘슬램덩크’는 언더독(이길 확률이 적은 팀 혹은 선수)의 이야기다. 북산고 농구부가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의 특출함 때문이 아니다. 북산고 주장 채치수는 결정적인 순간 센터로서 자기 능력을 의심한다. 정대만은 무릎 부상 후 방황하며 보낸 2년을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한다. 단신인 송태섭은 늘 자신보다 10㎝ 이상 큰 선수를 상대해야 한다. 초짜 강백호는 경험이 늘수록 자신은 천재라는 믿음이 흔들린다. 심지어 에이스로 불리는 서태웅조차도 동료에게 기대는 법을 몰랐다. 요컨대 북산고 농구부 선수들은 저마다 자신 안의 무언가와 싸운다. 각자가 가진 결점은 그들에게 이입하고, 그들을 응원하고, 끝내는 사랑하게 만든다.
그 누구의 그 어떤 싸움도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정대만이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까지 골을 던질 수 있었던 건 빗나간 공을 강백호가 받아 골로 연결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채치수가 상대 팀 골대 아래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있는 곳까지 송태섭이 돌파해 오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시합이 10초도 남지 않은 순간, 강백호가 ‘합숙 슛’ 성공률이 가장 높은 오른쪽 45°를 지키고 설 수 있었던 건 상대 수비 진영을 뚫은 서태웅이 자신에게 공을 패스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거 해요. ‘우리들은…(강하다)’ 말이에요.” 독불장군 같던 서태웅마저 풍전과 경기 도중 한쪽 눈을 다쳐 취약해진 순간 동료들에게 의지했다.
“‘강함’의 의미와 ‘잘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공감과 상상력이 중요하다. 아픔과 상실, 잘되지 않는 것, 살아가면서 누구나 통과하는 길을 표현하고자 했다.” ‘슬램덩크’를 만든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은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잘되지 않는 것’에서 ‘강함’으로 나아가는 길, 그 위 곳곳에 뿌려진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들이 선수들을 성장시켰다. 흩어졌던 개인들이 팀을 이뤄 서로를 지탱할 때, 안 감독이 주문한 “단호한 결의”는 비로소 꺾이지 않는 힘을 얻는다. 그러니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채소연의 물음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정말 좋아합니다. 그때도 이번에도 거짓이 아니라고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