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SF의 출발, 강수연의 마지막 ‘정이’ [설 연휴 골라볼까]

한국형 SF의 출발, 강수연의 마지막 ‘정이’ [설 연휴 골라볼까]

기사승인 2023-01-19 09:00:13
넷플릭스 영화 ‘정이’ 포스터

한국에서 SF 장르는 아직 무리라고? 넷플릭스 영화 ‘정이’는 이 질문에 대한 연상호 감독의 대답 같다. 한국 CG 기술의 발전 얘기가 아니다. 한국 영화 특유의 따뜻한 가족 정서를 차가운 A.I. 로봇 이야기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 둘 설정이 벗겨지며 이야기 주제가 드러나는 전개가 유려하다. 신뢰를 쌓는 데 성공한 영화는 마지막까지 시선을 잡아끈다.

‘정이’는 전투 용병 정이(김현주)가 힘겨운 미션을 통과하려고 분전하는 액션으로 시작한다. 결국 미션에 실패하자 현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35년 전 우주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최정예 용병 정이의 뇌를 복제한 A.I.가 겪는 가상현실이었다. 크로노이드 연구소는 정이가 가진 전술과 전투 기술이 남아 있는 뇌를 활용해 그가 마지막에 실패한 미션을 성공시키려 애쓴다. 크로노이드 연구소 연구팀장이자 정이의 딸인 서현(강수연)이 정이 프로젝트를 앞장서서 이끈다. 해수면 상승과 자원 고갈로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나 쉘터라는 공간을 우주에 마련한 2194년 인간들 이야기다.

‘정이’는 관객들에게 낯선 배경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정이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여러 시점을 통해서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은 의미 있는 A.I. 기술이라고 본다. 연구소장 상훈(류경수)과 크로노이드 회장은 전쟁을 통해 이익을 거두는 사업으로 본다. 정이의 딸인 서현에겐 어머니를 만나 더 알아가는 교감이다. 대중들에겐 유명한 전쟁 영웅을 다시 만나는 체험이다. 정이 프로젝트가 난관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영화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현란한 기술과 딸이 사망한 어머니를 A.I.로 마주하는 독특한 설정에 빠르게 익숙해진다.

넷플릭스 영화 ‘정이’ 스틸컷

고전적인 주제에 익숙한 정서를 입혔다. A.I.를 어떤 존재로 봐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이미 여러 SF 작품에서 봤던 주제다. 매일 보는 A.I.를 실제 인간으로 생각하는 순간, 그동안 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이야기다. ‘정이’는 A.I. 딜레마에 모녀 관계를 넣어 개인적인 서사로 접근한다. 서현에게 정이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인 동시에 자신이 만든 딸이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을 겪은 서현이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순간, 영화는 커다란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간다.

주연으로 출연한 두 배우 고 강수연과 김현주의 연기를 지켜보는 경험 역시 흥미롭다. 서현을 연기한 강수연은 말이 많지 않지만, 폭발 직전인 감정을 그대로 품고 전달한다. 반대로 김현주는 무감정한 A.I.의 움직임과 표정을 힘 빼고 연기한다. 가만히 있어도 이미 연기 중인 것이 느껴지고, 감정이 조금씩 삐져나오는 강수연의 연기 방식은 최근 배우들의 그것과 다르다. 그래서 한국 SF 장르의 낯선 느낌과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설 연휴에 가족들과 보기 좋은 영화다. 함께 봐도 불편할 장면이 거의 없고, 가족이 공감하기 좋은 이야기라 추천할 만하다. 2013년 영화 ‘주리’(감독 김동호) 이후 10년 만에 선보인 배우 강수연의 연기이자 마지막 연기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연기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는 20일 넷플릭스 공개. 12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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