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안 바뀌는 현실, 그래도 바꾸려는 영화 ‘다음 소희’ [쿡리뷰]

죽어도 안 바뀌는 현실, 그래도 바꾸려는 영화 ‘다음 소희’ [쿡리뷰]

기사승인 2023-02-02 07:00:06
영화 ‘다음 소희’ 포스터

소희(김시은)에겐 부족한 것이 없다. 춤을 잘 추기로 소문났고,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관계도 좋다. 좋아하는 남자친구도 있고, 비록 하청업체지만 대기업과 연관된 회사에 취직해 부모님이 기뻐한다. 이제 사무직으로 취업도 했으니,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 꿈에 부풀어 있다. 정작 회사는 소희의 마음을 옥죄기 시작한다. 소희의 세상은 점점 좁아진다. 어디로 가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소희는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 한 줌의 햇살뿐이란 걸 깨닫는다.

‘다음 소희’(감독 정주리)는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는 열여덟 살 고등학생 소희가 현장실습에 나가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취직한 콜센터는 생각한 것과 다르다. 회사는 실적과 인센티브로 직원들을 압박한다. 야근을 해도 수당을 받지 못하고, 월급도 계약서에 적힌 것보다 적게 받는다. 열심히 해서 버티고 더 잘하려 하는 소희의 머릿속에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다음 소희’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실화 사건을 재현해 현실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데서 멈출 생각이 없는 영화다. 두 개의 영화를 이어 붙인 듯 전반부와 후반부, 둘로 정확하게 나눠지는 영화다. 신선한 형식이 말해주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제목처럼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진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반부가 끝나면 영화는 사건에서 한 걸음 떨어진다. 그리고 맨 뒤에서부터 앞으로 역추적하기 시작한다. 관객은 이미 잘 알게 된 사건을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에서 되짚는 과정을 목격한다. 이 같은 작업은 영화에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낸다. 이야기를 거꾸로 돌리자 무엇이 잘못됐는지 보인다.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 한 사람의 불행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 소희’는 말을 한다. 정확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을 명확하게 끄집어낸다. 유진의 속 시원한 대사를 듣고 있으면 잠시 쾌감이 찾아온다. 곧바로 좌절과 절망이 거의 동시에 문을 연다. 여기저기 부딪치면서도 멈출 줄 모르고 앞으로 가는 유진의 발걸음 역시 시원한 동시에 씁쓸하고 안타깝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곱씹게 하는 영화다. 동시에 영화가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직접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회 현실을 다룬 기존 독립영화의 결과 조금 다르다. ‘다음 소희’는 굳이 아픈 곳을 더 아프게 찌르거나 끔찍한 장면으로 자극하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일부러 따스한 필터를 씌우지도 않는다. 그저 필요한 내용을 필요한 만큼만 그대로 보여준다. 온전히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공법으로 승부를 본다. 누가 봐도 부담스럽지 않고, 누구에게나 추천하기 좋다. 단 한 장면도 쉽게 넘어가지 않고 꼼꼼히 활용하는 점은 신뢰를 준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배우 김시은과 배두나의 열연을 보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다음 소희’에서 소희를 연기한 신인 배우 김시은은 선배인 배두나와 비슷한 존재감으로 혼자 영화의 절반을 훌륭히 채운다. 자연히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고 궁금해진다. tvN ‘비밀의 숲’, 영화 ‘브로커’(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에 이어 배두나가 또 경찰로 나온다. 하지만 이전 작품에서 보지 못했던 배두나의 진짜 경찰 연기를 볼 수 있다. 배두나에게서 보고 싶었던 경찰 연기가 이런 거였구나 깨닫게 한다.

지난해 열린 제75회 칸영화제에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초청된 영화다. 이후 판타지아국제영화제, 아미앵국제영화제, 도쿄필맥스영화제 등에서 여러 상을 수상했다. ‘다음 소희’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은 지난 31일 언론 시사회에서 “사건 전후의 일을 알아가면서 나 역시 그 일을 반복하게 하는 사회 전체의 일원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만들게 됐다”며 “나도 몰랐던 사실, 몰랐던 죽음이 왜 계속 마음에 남고 왜 이야기해야만 하는지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상영시간이 2시간18분으로 긴 편이지만, 흥미롭고 신선한 형식 덕분에 생각만큼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관을 나오며 자연스럽게 영화의 배경이 된 2016년 실화 사건을 찾아보게 한다.

오는 8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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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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