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원점 서도록”…‘더글로리’ 김은숙의 바람

“피해자가 원점 서도록”…‘더글로리’ 김은숙의 바람

기사승인 2023-03-29 16:07:18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를 촬영 중인 배우 송혜교. 넷플릭스

바둑판을 앞에 둔 두 남자. 양복을 입은 남자가 먼저 입을 연다. “복수로 취할 이득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게 더 손해일 것 같은데….” 맞은 편에 앉은 또 다른 남자는 묻는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중략)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송혜교) 후배의 열아홉 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를 쓴 김은숙 작가는 13화에 나오는 이 장면을 명장면으로 꼽았다.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으로 피폐해진 문동은이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김 작가는 29일 넷플릭스를 통해 “여정(이도현)이 얘기하는 피해자들의 원점이 좋았다. 그 대사가 ‘더 글로리’의 주제”라며 “배우 이도현이 숨소리까지 완벽하게 (주제를) 전달해줬다”고 뒷얘기를 전했다.

김은숙 작가. 넷플릭스

전국을 ‘연진(극중 학교폭력 주동자·임지연)아’ 열풍에 빠뜨렸던 ‘더 글로리’가 지난 10일 파트2 전편을 공개하며 막을 내렸다. 반응은 뜨겁다. 이날 넷플릭스에 따르면 ‘더 글로리’는 최근 3주 연속 비영어권 TV 부문 시청시간 1위를 기록했다. 공개 첫 주에는 전 세계 시청시간이 1억2446만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전 세계를 달군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첫 주 시청시간(6319만)의 두 배에 달한다. ‘더 글로리’는 파트2 공개 2주차(13~19일)에도 시청시간 1억을 넘겼다. 같은 기간 재생시간 1억을 돌파한 작품은 영어권과 비영어권을 통틀어 ‘더 글로리’가 유일했다.

김 작가는 “죽을 때까지 감사 인사를 모자랄 것 같다”며 “시청자 여러분, 저 지금 너무 신나요!”라고 말했다. 극 중 동은이 연진을 찾아가 “나 지금 되게 신나”라고 말한 대목을 패러디한 소감이다. 김 작가는 고등학생인 딸의 질문에서 영감을 얻어 ‘더 글로리’ 집필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엄마는 내가 누굴 죽도록 때리는 것과 죽도록 맞고 오는 것과 어떤 것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라는 물음에 ‘더 글로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광’을 뜻하는 제목은 여정이 언급한 원점과 관련 있다. 김 작가는 지난해 이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사과를 받아야 영광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되찾고 비로소 원점이 된다”고 말했다.

김 작가가 꼽은 ‘더 글로리’ 명장면도 피해자의 원점 복귀와 관련이 깊었다. 죽음을 결심했던 어린 동은(정지소)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웃 할머니(손숙)를 만난 장면. 할머니는 동은에게 “봄에 죽자, 봄에”라고 말한다. 김 작가는 이 장면을 명장면으로 언급하며 “손숙 선생님이 대사를 뱉자마자 어린 동은과 같은 타이밍에 오열했다”고 털어놨다. 여정과 동은이 서로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했다. “동은을 핑계로 살고 싶은 여정과 여정을 핑계로 살고 싶은 동은에게 ‘사랑해요’는 ‘살고 싶어요’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설명이다.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 박연진을 연기한 배우 임지연. 넷플릭스

동은을 연기한 송혜교는 실신 직전까지 갈 정도로 혼신을 바쳤다고 한다. 전날 공개된 코멘터리 영상에서 김 작가는 “혜교가 집이 불타는 장면을 찍고 탈진할 뻔 했다더라”고 귀띔했다. 폭력 가해자인 ‘동은오적’도 몸과 마음을 바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 쿠키뉴스와 만난 배우 임지연은 “마지막 교도소 장면을 찍고 나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사라 역의 배우 김히어라는 손명오(김건우) 장례식에서 연필로 최혜정(차주영)의 목을 찌른 장면을 촬영하고 나서 “기분이 너무 싸했다”고 후일담을 털어놨다. 동료들끼리 ‘당분간 이런 역할 하지 말자.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대화를 나눴을 정도라고 한다.

김 작가는 “성인 배우들 말고도 ‘동은오적’을 연기해준 아역 배우들, 예솔(오지율)이부터 손숙 선생님까지, 극에 등장해주신 모든 엄마들, 단 한 장면도 빈 곳 없이 꽉 채워준 모든 배우들에게 진심을 다해 감사드린다”고 했다. 시청자들에겐 “아껴보든, 한꺼번에 보든, 아주 먼 후일에 보든, 마지막까지 꼭 봐달라. 그래서 피해자들의 원점을 꼭 응원해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가 동은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도 애틋했다. 김 작가는 “사랑하는 동은아. 많이 아팠을 거야. 많이 울었을 거야. 더 많이 죽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도 뚜벅뚜벅 여기까지 와줘서 너무 고마워”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힘들었겠지만 네가 걸어온 그 모든 길이 누군가에겐 ‘지도’가 되었단 걸 알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어느 봄에는 꼭… 활짝 피어나길 바라, 동은아.”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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