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2500억4615만원. 카카오가 SM엔터테인먼트(SM) 지분 34.97%를 사들이는 데 들인 금액이다. 카카오는 지난달 7~26일 주당 15만원에 SM 주식을 공개매수해 833만3641주를 공시했다. 가요계에선 앞으로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대형 지주사-레이블’ 구조로 전환되는 사례가 증가하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K팝 시장이 ‘쩐의 전쟁터’가 되면서 과거 BTS 같은 ‘중소돌의 기적’이 탄생하기는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K팝 영향력 키우려면 규모의 경제 필요”
카카오와 SM의 만남은 슈퍼 IP(지식재산)와 글로벌 플랫폼을 향한 두 회사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사례다. 특히 카카오는 스타쉽엔터테인먼트, IST엔터테인먼트, 안테나 등 여러 연예기획사를 자회사로 흡수하며 콘텐츠 시장에 눈독 들여왔다. 이아름 한국콘텐츠진흥원 미래정책팀 책임연구원은 “IT 기업은 자사 플랫폼으로 유통할 콘텐츠가 절실하다. 반대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는 자사 IP를 해외로 알릴 유통망을 원한다”며 “향후 거대 플랫폼이나 IT 기업, 대형 기업이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투자하거나 IP 확보에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소수 기업에 자본이 쏠리는 움직임은 K팝 시장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짚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기획사의 레이블화는 미국과 유럽에선 이미 흔한 일”이라며 “음악 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산하에 여러 레이블을 거느린 대기업이 등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기업이 K팝 시장을 독점해 다양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에는 “기우”라고 선을 그었다. “팝 시장을 봐도 대형 뮤직 그룹 산하 레이블이 모두 비슷한 음악을 하지는 않는다. 군소 기획사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분석이다.
K팝이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히려면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SM 인수전에서 고배를 삼킨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지난달 15일 관훈포럼에서 한 말이다. 방 의장은 빅3 유통사로 꼽히는 유니버설·소니·워너뮤직의 세계 음반 시장 매출 점유율이 67.4%에 달한다면서 “글로벌 유통사를 상대로 협상력을 키우려면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슈퍼 IP를 지속적으로 배출해내기 위한 제작 시스템 안착과 아티스트·연습생·직원 처우 개선을 위해서도 자본력이 필요하다고 방 의장은 강조했다.
“3년 버티기도 힘들어”…중소기획사 속사정
규모가 작은 K팝 기획사 사이에선 아이돌 그룹을 띄우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성토가 나온다. 음반 제작뿐 아니라 마케팅, 프로모션, 콘텐츠 제작 등 돈 들일 곳은 많아졌으나, 성공 확률은 희박해져서다. 익명을 요청한 중소기획사 고위 관계자는 “‘중소돌’의 기적은 갈수록 어려울 거라고 본다”고 했다. “플랫폼은 한정적이고 콘텐츠는 넘쳐나는 상황에서 결국 자본의 힘이 중요하다. 그런데 중소기획사는 자본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중소기획사 관계자는 “팬덤을 모아 해외로 진출하기까지 최소 2~3년은 걸리지만, 이 기간조차 버티기 어려운 회사가 많다”고 귀띔했다. 사정이 이러니 “차라리 대형 기획사 산하 레이블로 편입돼 돈 걱정을 줄이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한국음악콘텐츠협회에서 운영하는 써클차트(옛 가온차트)의 지난해 음반 차트를 보면 1~10위를 차지한 가수는 BTS, 스트레이 키즈, 세븐틴, 블랙핑크 등 모두 대형기획사 소속이다. 범위를 상위 20위로 넓혀봐도 중소기획사 소속은 임영웅(물고기뮤직 소속)과 그룹 에이티즈(KQ엔터테인먼트) 둘 뿐이다. SM은 하이브가 인수를 시도했을 당시 “두 회사가 결합할 시 전체 K팝 시장 매출의 약 66%를 차지하는 독과점적 단일 기업군이 탄생한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업계에선 K팝 자본의 독점화보다 단일 회사가 음원 제작과 유통,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겸하는 수직계열화가 더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음원 플랫폼 멜론을 운영하는 동시에 산하 레이블 여러 곳을 둔 카카오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 평론가는 “영화계는 소수 대기업이 투자·배급과 극장 운영을 동시에 하는 수직계열화를 이뤘다가 최근 한국영화 흥행 부진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며 “가요계에서도 이런 문제가 벌어지지 않을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