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에 가까운 키, 떡 벌어진 어깨, 날렵한 눈매…. 넷플릭스 오리지널 ‘택배기사’ 주인공 5-8은 배우 김우빈을 만나 개성이 또렷해진 사례다. 한눈에도 강인해 보이는 신체 때문만은 아니다. 5-8은 모든 게 무너진 세계에서도 이상향을 향해 돌진하는 인물이다.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병을 앓고도 “우리에겐 행복할 의무가 있다”고 힘줘 말하는 김우빈을 빼닮았다.
“저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자격과 행복할 의무가 있다고 믿어요. 5-8 역시 어떻게 하면 모두가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인물이죠. 그게 우리의 공통점이에요.” 지난 17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우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출연한 ‘택배기사’는 행성 충돌로 대기가 오염된 서울에서 5-8과 난민 사월(강유석)이 산소와 권력을 쥔 천명그룹에 맞서는 이야기. 뛰어난 전투 능력 덕분에 난민에서 택배기사로 신분 상승한 5-8은 밤이면 검은 기사가 돼 남몰래 난민을 돕는다. 동명 웹툰을 각색한 이 드라마는 지난 12일 공개 이후 일주일 만에 비영어권 콘텐츠 가운데 가장 많은 글로벌 시청시간을 기록했다.
김우빈은 “이야기가 흥미롭고 캐릭터가 궁금해서” 이 작품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메가폰을 잡은 조의석 감독과는 주연 데뷔작인 영화 ‘마스터’로 한 차례 호흡을 확인한 사이. 김우빈은 “‘택배기사’는 감독님 전작들과 색깔이 다르지만 (작품이 잘 완성될까 하는) 의심은 전혀 없었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생각한 대로 현장을 지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돌아봤다. 작품엔 CG(컴퓨터그래픽)가 많이 쓰여 크로마키 앞에서 연기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김우빈은 “영화 ‘외계+인’(감독 최동훈)에서 하늘을 날며 빔을 쏴봤더니 어떤 촬영도 가능하겠다 싶더라. 그때 경험이 도움을 줬다”며 웃었다.
“사막화한 서울이 어떻게 세트로 구현됐을지 기대하며 현장에 갔는데, 전부 흙바닥이더라고요. 하하. CG의 힘이 컸어요. 제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도 CG로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CG팀에 물어보니 원래 있던 연기를 지우는 건 어려워도, 없는 연기를 만드는 일은 오히려 쉽다더라고요. ‘이 정도면 연기가 올라와서 눈이 따가울 거야’ ‘담뱃불이 옷으로 튈 수도 있겠지’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그러니 흡연 장면을 보시고 (건강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담배는 예전에 이미 끊었어요.”
드라마는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모습이 낯설지는 않다. 미세먼지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대확산 이후 마스크가 필수인 일상을 우리가 이미 경험해서다. 김우빈도 “(지구 사막화가) 실제로 벌어질 수 있겠더라”며 “그동안 환경문제에 둔감했다고 생각해 요즘은 하루에 한 번이라도 일회용품을 덜 쓰려 노력 중”이라고 했다. 그는 인터뷰 현장에도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에 음료를 담아 마셨다. 플라스틱 컵을 든 취재진이 민망할까 염려한 것일까. 그는 “하지만 여전히 플라스틱 빨대를 쓰고 있다”고 농담을 건넸다.
영화 ‘외게+인’,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 이어 비인두암 투병 이후 세 번째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고난이 사람을 깊어지게 만든 걸까. 김우빈은 “우리 모두 행복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까먹기 마련이다. 나 또한 내게서 단점을 찾으려 할 때가 있다”면서 “‘택배기사’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스스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임을 되새기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인간을 향한 김우빈의 애정은 주변 사람들로도 뻗친다. 그는 ‘택배기사’ 공개 직후 SNS에 택배기사 역으로 등장한 단역 배우들과 스턴트 배우들 이름을 일일이 적었다. “좋은 배우이자 좋은 사람들이라, 시청자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실 것 같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역할모델이라는 점에서도 김우빈과 5-8은 닮았다.
“감사일기(김우빈은 데뷔 초부터 14년 넘게 감사한 일들을 일기로 남겨두고 있다), 지금도 쓰고 있어요. 거창한 일보다는 작은 것들을 찾으려 해요. ‘택배기사’를 촬영하면서는 큰 사고나 부상이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장 자주 감사했죠. 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잖아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더더욱 지금 느끼는 감사함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