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씩 삶은 사소한 계기 하나로 변화를 맞는다. 배우 이준혁에게는 전화 한 통이 그랬다. 사소한 고민이 눈덩이처럼 커지던 날, 그는 뜻밖의 인물에게 연락을 받았다. 내용은 단순했다. “어 준혁아, ‘범죄도시’ 3편을 만들 거야. 근데 네가 빌런(악당)을 맡아줬으면 해.” 홀린 듯 그가 내놓은 대답은 “알겠어요.” 2편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던 때, 출연을 확정하던 당시를 이준혁은 이렇게 기억한다. “제 삶에 나름 임팩트가 있는 순간이었죠. 하하.”
이준혁이 대본도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한 영화는 ‘범죄도시3’(감독 이상용). 그는 평소 절친하게 지내는 마동석 전화에 곧장 체력 단련부터 시작했다. 몸을 키우면 좋겠다는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아서다. 최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쿠키뉴스와 만난 그는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배우가 내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게 꿈 같더라”면서 “인생에 타이밍이란 게 정말로 있나 보다”며 미소 지었다.
‘범죄도시3’에서 이준혁은 빌런 주성철을 연기한다. 처음엔 자신이 ‘범죄도시’ 시리즈의 악역을 맡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단다. 주성철은 장첸(‘범죄도시1’·윤계상), 강해상(‘범죄도시2’·손석구)과 확연히 다른 인물이다. 이준혁은 주성철에게서 지적이며 거친 면을 발견했다. 존재만으로도 반전 요소가 담겼다는 설명이다. 이준혁은 주성철을 “실패해본 적이 없어 자신감이 가득한 사람”으로 파악하고 연기를 준비했다.
“늘 성공가도만 달리던 주성철에게 자연스럽게 나쁜 물이 든 것 같아요. 열심히 일하는 자신보다 더 떵떵거리며 사는 악인들에게 영향을 받은 거죠. 그후로는 계속 좋지 않게 살다 인생 최고의 거래를 앞두고 마석도(마동석)라는 암초를 만난 거예요. 하지만 그는 실패와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안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주성철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에서 나오거든요.”
그을린 피부에 형형한 눈빛, 이리저리 뻗친 장발과 거친 분위기. 주성철의 외형을 구현하는 건 숙제였다. “지금보다 날것의 모습으로 더 많이 망가지면 좋겠다”는 이상용 감독의 요구에 집중했다. 기존 작품에서 보인 모습과 달라지는 데 주력했다. 신선하다는 평을 듣기 위해 골몰한 결과 지금의 주성철이 탄생했다. 세세한 부분에도 신경 썼다. 극 중 주성철은 악행을 저지를 때에는 밝은 정장을 입지만 본업에 임할 땐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는다. 액션은 투박하고 과격하다. 롱 테이크(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긴 시간 촬영하는 기법)로 담은 중국 바이어와의 맞대결 장면은 그가 고생했다고 꼽는 대표 장면이다.
이준혁은 현장을 “뜨겁다”고 회상했다. 현장에서 열정을 드러내던 이 감독의 모습이 꿈에 나타났을 정도다. 배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오랜 시간 ‘범죄도시3’에 매달렸다. 이준혁 역시 그렇다. 주성철이 되기 위해 평소 듣는 음악부터 먹는 음식은 물론 생활양식까지 바꿨단다. 고생 끝에 마동석과 대치 창면을 찍을 땐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이준혁은 “복부에 마동석의 주먹이 꽂히자 장기가 흔들리는 듯했다”면서 “슈퍼 히어로 주먹에 맞을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씩 웃었다.
이준혁은 디즈니+ ‘비질란테’와 티빙 오리지널 ‘좋거나 나쁜 동재’(‘비밀의 숲’ 서동재 번외 이야기) 등 차기작 두 편을 확정한 상태다. 그는 “돈과 개인 삶, 배우로서 성취, 대중에게 받는 사랑 중에서 내가 완벽하게 가진 건 없다”면서 “대중에게나 연기자로서 아직 최고가 아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달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명이라는 인고 세월을 거쳐 이준혁은 이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는 배우로 성장했다.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동시간” 덕이다. tvN ‘비밀의 숲’ 시리즈·‘60일, 지정생존자’ 등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 여럿이다. 그는 “빈말로라도 노력을 안했다곤 못 하겠다”고 말하며 “앞으로도 열심히 살겠다”고 힘줘 말했다.
“작품을 할 때면 언제나 부담을 느껴요. 그래도 달려야 하는 이유요? 슈퍼스타가 아니니까요. 아직 정점을 찍지 못했거든요. 확실하게 일군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더 열심히 달릴 거예요. 그러다 보면 서동재처럼 의외인 친구를 만날 수도 있겠죠? 고민 많던 때에 주성철이라는 고마운 전환점을 만났듯이요. 꾸준히 달리기만 한다면 좋은 기회는 또 오리라 믿어요. 이게 제 원동력이에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