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 오리지널 ‘박하경 여행기’는 잔잔한 드라마다. 고등학교 교사 박하경(이나영)이 지친 한 주를 마치고 당일치기로 여행을 가는 내용이 전부다. 극적인 사건이나 비현실적인 캐릭터도 없다. 직장인 싱글 여성이라면 공감할 만한 일상이 8부 내내 이어진다. 그런데 이 심심한 이야기, 묘하게 잔상이 짙다. 별다른 일도 없는데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고 이따금씩 눈물이 차오른다. 박하경의 감정에 따라 설레다가 낙담하고, 덩달아 흐뭇한 마음을 느끼기도 한다.
극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감정이 발화하는 이 드라마는 이종필 감독과 배우 이나영이 머리를 맞댄 결과다. 최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과 이나영은 “애쓰지 않으면서도 억지 부리지 않는 이야기이길 바랐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박하경 여행기’를 “만들면서도 좋았고 완성한 뒤엔 만족스럽던” 작업으로 기억했다. 전작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후 처음으로 미드폼 드라마에 도전한 이 감독은 “이런 작품을 또 만들 수 있을까 싶다”며 “재미있다는 말보다 좋다는 반응이 마음에 와닿더라”며 웃었다.
이 감독은 작가와 시나리오를 작업할 때부터 박하경 역에 이나영을 떠올렸다고 한다. “캐스팅 성사 후 쾌재를 불렀다”는 감독은 이나영을 만난 뒤 더욱더 확신을 얻었다. 곧장 박하경에 녹아들어서다. 작품 공개 후 시청자 사이에서는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는 평이 잇따랐다. “불특정다수가 박하경을 자화상처럼 보길 바랐다”는 이 감독의 의도가 성공한 셈이다. 이나영에게 ‘박하경 여행기’는 반갑지만 고민을 안기게 한 작품이다. 이나영은 담백하고 신선한 분위기에 끌려 4년 만의 복귀작으로 ‘박하경 여행기’를 택했다. 데뷔 25년 차인 그에게도 ‘박하경 여행기’는 독특했다.
“처음엔 연기하기 쉬울 줄 알았어요. 멍하게 있으면 되겠지 싶었거든요.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연기로 채울 게 없는 거예요. 극은 흘러가는데 공백을 무엇으로 메워야 할지 모르겠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캐릭터를 가두는 경계가 없으니까, 순간에 충실하면 오히려 새로운 그림이 나오겠다고요. 무방비한 데서 나오는 재미가 있잖아요. 짜임새 있는 호흡보다 다소 어색한 모습이 여행과도 더 어울리고요. 촬영하면서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곤 했어요. 현장에 모인 모든 분이 작업을 한다기 보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한 기분이었어요. 새로웠죠.”
감독은 ‘박하경 여행기’를 뺄셈에 비유해 설명했다. 극에는 회마다 쉴 틈이 있다. 내용을 이해하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흘러가는 대로 이야기를 삼키다 보면 자연히 박하경의 감정이 시청자에게 입혀진다. “빈 부분이 있어야 시청자가 이입할 공간이 생긴다”는 감독의 지론 하에 ‘박하경 여행기’에는 군더더기를 뺀 의도적인 여백이 가득 담겼다. 이나영은 꾸며낸 연기를 지양했단다. 그는 “뭔가를 더하지 않고 덜어낸 건 ‘박하경 여행기’가 처음”이라고 했다. 덕분에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 중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이 탄생했다. 이나영이 스스로를 작품에 내던졌다면, 감독은 기존의 틀을 깨는 데 골몰했다.
“‘박하경 여행기’는 생각과 경험의 총집합체 같은 작품이에요. 보통 영화는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사건과 사연, 뚜렷한 캐릭터 설정이 들어가요. 모든 것을 집약한 상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게 한국영화거든요. ‘박하경 여행기’는 정반대예요. 영화로 만들기엔 작은 이야기를 모아 우리 일상을 그려냈죠. 보통 우스갯소리로 인류 미래를 걱정하는 게 할리우드 영화라고들 하잖아요. 그렇다면 ‘나’의 오늘을 걱정하는 영화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보시는 분들이 각자 경험을 떠올리며 공감하고, 동시에 낙담하지 말라는 위로를 얻길 바랐어요.”
감독과 이나영은 “‘박하경 여행기’를 만들며 세상을 보고 사람을 만났다”고 돌아봤다. 이나영은 “캐릭터를 규정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감정과 그로 인해 확장한 연기의 세계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요즘 꽂힌 표현이 있어요. ‘거하지 않게’인데요, 우리는 조금 덜 작정할 필요가 있어요. 거하지 않게 가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담백하게 말하는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이나영과 감독이 강조한 건 또 있었다. 이들은 드라마를 숙제처럼 보지 않길 희망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드라마까지 치열하게 볼 필요는 없지 않냐”는 설명이다. “뭔가를 느껴야겠다는 의무감보다는 멍하게 봐주세요. 시간 날 때, 슬그머니 보시면 분명 좋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확신을 갖고 만들었거든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