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출생통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왔다. 국제사회의 권고도 있었다. 그때마다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런데 (출생 미신고 아동에 대한) 감사원 조사 결과가 나오고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출생통보제 법안이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해 너무 기쁘지만, 이렇게 빨리 될 수 있었다니. 그동안 방치되거나 살해된 아이들도 있다. 결국 국회 의지만 있다면 (차별금지법도) 통과될 수 있다” (김진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동 국회에서 열린 ‘혐오차별 너머, 평등으로’ 토론회에서 전문가와 시민단체들은 “국회 의지가 중요하다”며 정치권이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차별금지법은 지난 2020년 6월 장혜영 정의당 의원에 의해 대표 발의돼, 2021년 6월 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국민동의 청원으로 19만 명의 동의를 얻어 법사위에 소환됐다. 지난해 12월6일 법사위 1소위에서 차별금지법을 상정하려 했으나, 국민의힘과 법무부의 불참으로 불발된 이후 논의조차 없었다.
박한희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집행위원(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은 “차별금지법 제정 실패가 아닌 정치의 실패”라며 “전 야당, 현 여당인 국민의힘의 발목잡기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차별금지법 제정에 뚜렷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긴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차별금지법 발의 전부터 법률 제정 필요성을 주장해온 김진 변호사 역시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하고 자괴감도 든다”고 했다.
이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이 미뤄지는 동안 한국 사회 인권과 평등 수준이 후퇴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는 “각 지역의 인권 현실은 심각하다. 이전보다 후퇴했다”며 “평등 원칙을 열망함에도 정치와 제도권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차별금지법과 관련해 성소수자 차별에 유독 관심이 주목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도 나왔다. 박한희 집행위원은 한국의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묻는 영국 대사관 관계자의 질문에 “퀴어축제 때 사람들도 많고 대사관에서도 많이 찾아주셔서 항상 감사하다”며 “한편으론 (차별을) 다투는 현실은 매우 많다. 학생인권조례나 혼인 평등, 이슬람 사원 등 성소수자 문제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의 차별 사안이 많기 때문에 대사들의 목소리가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차별과 혐오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 사례들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박고은 한겨레 기자는 “헌법은 누구든 차별받지 않도록 정하고 있지만 무엇이 차별인지, 차별의 예방과 구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할 법적·제도적 언어가 부재하다”며 “차별 입증 단계부터 피해자들은 높은 벽을 경험한다”고 했다. 박 기자는 △성전환 수술 후 강제 전역 처분을 받고 숨진 고 변희수 하사 △A제약 성차별 면접 △스쿨 미투 △B대학병원 비정규직 경력 불인정 △노키즈존 등을 차별 사례로 들었다. 박 기자는 “차별금지법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법”이라며 “피해자가 정확하고 손쉽게 법적 제기를 할 수 있고, 법원에서도 법적 근거가 명확해져 적극적으로 판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피해자가 구제받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엔(UN) 역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한국 정부에 여러 차례 권고한 바 있다. 이번 토론회에서도 클로드 칸(Mr. Claude Cahn)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UN OHCHR) 담당관은 실시간 온라인 강연을 통해 유엔의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지침을 소개하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누구라도 차별을 겪을 수 있다. 소수 종교, 젠더, 연령 등 여러 가지 사유로 누구나 차별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 때문에 국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강연 중 현지 시간 새벽 2시라고 전한 그는 “필요한 만큼 있겠다”며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에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여성·장애인·성소수자·노인·사회적 참사 피해자 등을 향한 혐오 표현을 온라인·오프라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며 “평등법(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혐오와 차별 행위가 즉시 해소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송 위원장은 “평등법이 제정되면 무엇이 혐오와 차별인지, 판단기준은 무엇인지, 혐오와 차별이 무슨 문제인지, 모든 사람이 존엄한 인격으로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등이 분명하게 제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