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1억에 지쳐 치료 포기” 중증·희귀질환, ‘급여 허들’에 속수무책

“연간 1억에 지쳐 치료 포기” 중증·희귀질환, ‘급여 허들’에 속수무책

길고 복잡한 중증·희귀질환 치료제 급여 승인 과정
“희귀질환은 사회적 질환…사각지대 해소 위한 다각적 지원 필요”
제2차 건보 종합계획에 의견 반영…“신약 접근성 강화 방안 모색”

기사승인 2023-07-06 06:00:25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가 5일 서울 중구 을지로 페럼타워에서 개최한 ‘중증·희귀질환 환자 중심 건강보험재정 개편 방안 심포지엄’에서 중증·희귀질환 보장성 강화 방안이 논의됐다.   사진=신대현 기자

# 임신 38주차에 건강한 남자 아이를 출산하고 잘 키워가던 임채원 씨는 아이가 생후 8개월째 되던 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이가 뒤집기를 못하고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 찾은 대학병원에서 척수성근위축증(SMA)을 진단 받았기 때문이다. SMA는 척추신경이나 간뇌에 있는 운동신경세포가 서서히 파괴되는 소아 신경·근육계 희귀질환이다. 발병 시 근육 약화, 움직임 상실, 호흡 곤란 등을 겪으며 평균 2년 안에 사망에 이르는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임 씨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치료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8월, 1회 투여 비용이 20억원에 달하는 ‘졸겐스마’(성분명 오나셈노진아베파르보벡)에 대해 급여가 적용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졸겐스마는 단 한 번의 투약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원샷 치료제’로 불린다. 임 씨는 아이가 졸겐스마 투약 조건에 부합한다는 소식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임 씨는 “600만원가량을 부담하고 아이가 졸겐스마를 투여 받은 지 303일째다. 현재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2년 전만 해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던 아이가 지금은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됐다. 건강한 또래 아이들에 비해 힘이 부족하지만 분명히 좋아지고 있다. 이 모든 게 신약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임 씨의 사례처럼 중증·난치성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은 치료를 위해 신약에 의지한다. 하지만 신약의 가격을 감당하기 어렵다. 급여가 적용되길 간절히 희망할 뿐이다. 

신약의 급여 등재 과정은 순탄치 않다. 한정된 건강보험재정(건보재정)이 발목을 잡는다. 건보재정 중 약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급여가 결정돼도 최종 허가가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떻게 하면, 중증·희귀질환 환자들이 부담을 덜고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가 5일 서울 중구 을지로 페럼타워에서 개최한 ‘중증·희귀질환 환자 중심 건강보험재정 개편 방안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이번 심포지엄은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 수립을 앞두고, 중증·희귀질환의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향을 찾기 위해 마련됐다.

기약없는 신약 급여…치료 접는 중증·희귀질환자들

환자들은 복잡한 허가 기준 때문에 신약이 급여화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입을 모았다. 그 과정에서 치료를 포기하거나 기다리다 사망하는 일이 생긴다며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백진영 한국신장암환우회 대표는 “병용요법이 필요한 중증·희귀질환 환자의 치료약제 선택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라며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신약의 급여 신청은 각 제약사의 의지에 달렸고, 신청 후에도 중증질환심의위원회, 약제평가위원회, 약가 협상 등을 거쳐 급여 등재까지 도달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환자들은 연간 1억여원의 치료비를 부담하다가 지쳐 치료를 포기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정부는 빈틈없는 재정 관리를 통해 건강보험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의료비 부담을 완화하는 국정과제를 제시했지만 정작 환자들은 과거와 비교해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며 “약제 접근성 향상을 위해 제약사의 급여 신청 유인책을 마련하고, 중증·희귀질환 치료제에 대한 급여 승인 과정을 간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진향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사무총장은 “80만 희귀질환자와 200만 가족들은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본인부담금상한제, 희귀난치성질환자 산정특례제도 등 지원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해당 사업의 대상이 되는 환자와 가족들에 대한 실태조사나 정책 홍보는 활발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사무총장은 “신약의 임상 현황 등 희귀질환 치료 여건이 다변화되고 있어 이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라면서도 “희귀질환은 환자 개인이나 가족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적인 질환이다. 건강보험 정책에서 소외되는 환자들의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줄이고,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하려면 다각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치료제 환경 변화 따른 유연한 급여 제도 필요”

종양내과 전문의들은 급속한 치료제 환경 변화에 맞게 허가와 급여 제도가 유연하게 개선돼야 한다고 짚었다.

안희경 가천대길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신약 사용 허가가 나지 않으면 환자가 원해도 처방이 쉽지 않고, 허가 가능성이 있더라도 사용 가능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며 “속수무책으로 기다리기만 하다가 건강이 나빠지는 환자들을 볼 때 의료진의 안타까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이어 “건보재정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신약 치료 여부는 결국 누가 돈을 얼마나 더 낼 것인가에 달렸다”며 “건강한 사람, 경증질환자, 암환자, 제약사, 정부 등 이해관계자들 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강진형 미래건강네트워크 이사(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경증질환에 따른 건보재정 손실을 줄이고 필수의료와 중증질환 중심의 운용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이사는 “현재 우리나라 같은 사회주의적인 의료보험 시스템 안에서 보장성을 강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보장성 강화는 여기까지이고 중증질환이나 필수의료에 대한 보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며 “중증질환과 필수의료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정립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아울러 “신속한 급여 적용 방안으로 신약에 대한 ‘선급여 후평가 제도 시범사업’을 실시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약제나 신의료기술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환자·전문가 의견 종합해 건보 종합계획 마련”

정부는 신속한 신약 급여 등재 필요성에 공감하며 환자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해 조만간 발표될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에 녹여내겠다고 했다.

유미영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관리실장은 “그동안 정부는 중증·희귀질환을 중심으로 보장성 강화에 역점을 두고 제도 개선을 해왔다”며 “건보재정이 한정적이니까 재원을 확대하는 대신 기존에 있던 일반 약제들에 대한 재평가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외 약 가격의 차이도 파악해 비교할 계획이다”라며 “이 자리에서 나온 많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신약 접근성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손호준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정책과장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향후 건보재정의 위기가 올 수 있는 만큼 대비가 필요하다”며 “새어 나가는 건보재정을 막아야 고령화로 인한 재정적인 부담을 덜 수 있다. 관련 방안들을 모색해 종합계획에 담을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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