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숙증약이 키 크는 약으로 둔갑”…과잉진료 제동

“성조숙증약이 키 크는 약으로 둔갑”…과잉진료 제동

기사승인 2023-08-03 06:00:06
게티이미지뱅크

‘성조숙증 치료제’로 불리는 ‘성선자극호르몬분비호르몬 작용제(GnRH-agonist)’ 주사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GnRH-agonist 주사제가 일명 ‘키 크는 주사’로 둔갑해 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섰지만,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와 한의사들은 GnRH-agonist 주사제 오남용과 과잉 진료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불필요한 치료를 부추겨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불안과 불편을 야기할 수 있다며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시 후 부모들 민원 쇄도…“어떻게 대처하라는 건가”

2일 의료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아이가 중추성사춘기조발증(이하 성조숙증)에 해당하지 않음에도 치료제 투여가 이뤄지고 불필요한 치료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 5월 GnRH-agonist 주사제 급여기준 개선안을 담은 ‘요양급여의 적용기준 및 방법에 관한 세부사항(약제) 일부개정고시안’을 행정 예고했다. 

고시안을 보면, GnRH-agonist 주사제의 현행 급여 적용 연령 기준을 여아 만 9세, 남아 만 10세에서 여아 만 8세, 남아 만 9세로 각각 한 살씩 낮추고 투여 대상을 보다 명확히 했다.

복지부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거쳐 6월부터 바뀐 기준을 적용하려고 했지만, 성조숙증 자녀가 있는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히며 ‘보류’를 택했다. 실제 해당 고시안을 예고한 뒤 복지부 입법·행정예고 전자공청회 게시판에 학부모들의 민원이 쇄도했다.

아이가 성조숙증 증상을 보여 8월에 검사 예약을 해놨다는 부모 A씨는 “이렇게 갑자기 성조숙증약 투여 대상 연령을 낮춰버리면 미리 대비도 못하고 돈도 부족한 서민들은 어떻게 대처하라는 것이냐”라며 “안 그래도 병원 예약 잡기가 힘든데 어떻게든 검사하고 결과까지 내놓으라고 병원과 싸워야 하는 것이냐”라고 토로했다.

2014년 8월생 아이가 성조숙증이 의심돼 지난해 연말 혈액검사를 받고 현재 추적관찰 중이라는 부모 B씨는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위해 생일 전에 다시 검사한 뒤 성조숙증 여부를 가리자고 해서 7월 중순으로 병원 예약을 하고 기다리던 중에 관련 소식을 접하게 돼 너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B씨는 “기다릴 수 없어 급하게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예약은 다 차있고, 검사 결과를 받기까지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며 “고시 공지 후 시행까지 최소 1년 정도의 기한을 줘야 부모들이 계획을 변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건복지부 입법·행정예고 전자공청회 게시판 갈무리.


성조숙증 치료 급증…12년 사이 남아 83배 증가

최근 아이의 성조숙증이 의심돼 병원을 찾는 부모들이 부쩍 늘었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아이들의 키 크는 문제에 대해 워낙 관심이 높다 보니 병원을 찾아 성조숙증에 대해 물어보고 상의하는 부모들이 많이 늘었다”고 전했다.

박미정·김신혜 상계백병원 소아청소년과 성장클리닉 교수 연구팀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이용해 9세 미만 여아와 10세 미만 남아 중 성조숙증으로 치료받은 13만3283명을 분석한 결과, 2008년 대비 2020년 여아는 15.9배, 남아는 83.3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조숙증은 보통 여아에서 발생률이 높지만, 남아도 최근 12년 사이 발생률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성조숙증은 어린 나이에 2차 성징, 즉 사춘기가 일찍 오는 것으로, 성장 부진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여아의 경우 8세 이전, 남아는 9세 이전에 사춘기 증상이 시작됐다면 혈액검사와 성장판 검사를 통해 성조숙증 여부를 진단한다.

성조숙증으로 인한 신체적 특징은 성호르몬의 영향으로 성장판이 일찍 닫혀 최종적인 키가 작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아에서는 조기 초경이 발생하며 성호르몬 관련 암 위험이 커질 수 있다. 더불어 또래보다 발육이 빨라 사회적·심리적 스트레스를 겪기도 한다. 

양승 한양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성조숙증은 치료하지 않으면 키 손실이 더 생긴다. 성장판이 일찍 닫히기 때문”이라며 “치료를 하면 대개 손실된 키의 60% 정도 회복하는 효과를 본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키가 큰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치료를 받아도 키 손실을 줄이는 게 쉽지 않다보니 GnRH-agonist 주사제에 의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주사제는 호르몬 분비를 억제해 급성장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동시에 성장판이 닫히는 시기를 늦춰 성장 기간을 연장하는 효과를 갖는다. 

실제 온라인커뮤니티에서는 ‘성조숙증 치료제 덕을 봤다’, ‘또래들보다 아이 키가 작아서 고민인데, 성조숙증 치료제 쓰면 정말 키 크나요’ 등 GnRH-agonist 주사제 사용 후기나 문의 글들이 여럿 눈에 띈다

“치료제 적정 사용 위한 것”…정부, 개정 고시안 시행 시기 검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와 한의사들은 “과잉 진료가 우려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양승 교수는 “과잉 진단과 치료는 아이와 부모에게 불편과 불안을 안길 수 있다”며 “GnRH-agonist 주사제의 오남용 등을 줄이기 위해선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과 치료에 따른 이익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확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선우 대한한의사협회 의무이사 역시 “성조숙증 치료를 위해 GnRH-agonist 주사제가 남용되는 것은 큰 문제다”라며 “정부가 성조숙증 진단 연령을 명시하는 고시 개정안을 추진하는 것에 적극 찬성한다”고 전했다.

20여 년간 성조숙증 치료를 해온 익명을 요구한 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성조숙증 치료는 보통 8~9세 때 시작해서 여아의 경우 평균 11세까지 이어진다”며 “의료급여 적용 한도 내에서 어떻게 치료할지는 의사들의 재량에 맡겨야 하는 면이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아이 본인이나 부모가 성조숙증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의료급여 인정 나이가 지나서 진단되면 난감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며 “진단이 늦어 치료가 힘들어지는 ‘회색 지대’가 있을 수 있어 성조숙증 치료는 하나하나 일반화시킬 수 없다”고 피력했다.

정부는 성조숙증 치료 급여 기준을 명확히 하기 위해 관련 학회와 의사회 등 전문가들과 논의를 가져가겠다는 입장이다. 심평원 관계자는 “일부개정고시안 취지는 성조숙증 치료제의 적정한 사용을 이끌고 진료지침에 있는 진단 기준과 약제 급여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며 “전문가들과 급여 기준 개정 관련 안내 자료와 교육 홍보 방안, 고시 개정 시행 시기에 대해 논의와 검토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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