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란만큼 정형화되지 않은 중년 여성을 표현할 배우가 또 있을까. 그는 작품에서 “매 맞지만 명랑한” 가정폭력 피해자였고(넷플릭스 ‘더글로리’), 연하 남편을 휘어잡는 변호사였으며(KBS2 ‘동백꽃 필 무렵’), 악귀와 싸우는 초능력자였다(OCN ‘경이로운 소문’). 그중 가장 파격적인 변신을 꼽으라면 단연 넷플릭스 ‘마스크걸’이다. 염혜란은 아들 주오남(안재홍)을 죽인 마스크걸에게 복수하려는 김경자를 맡아 섬뜩한 모성애를 보여준다. 시청자들은 이런 그에게 ‘염바르뎀’이란 별명을 붙였다. 단발머리를 한 채 마스크걸을 뒤쫓는 모습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감독 에단 코엔·조엘 코엔) 속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을 닮아서다.
“듣기 좋은 별명이에요. 하비에르 바르뎀이 워낙 훌륭한 배우인 데다, 어느 순간 단발의 아이콘이 됐잖아요.” 29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염혜란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경자에게 어울릴 머리 스타일을 찾고자 여러 가발을 써봤다. “김경자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라 가장 대중적인 엄마 이미지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택했다”는 게 단발 변신의 이유다. 얼굴엔 눈그늘과 주름살을 커다랗게 그렸다. 경자가 노년으로 접어들고부터는 복대를 차고, 속옷 대신 러닝셔츠를 입었다. 축 늘어진 뱃살과 가슴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분장이 거추장스러웠을 법도 한데 염혜란은 “가면(분장) 뒤로 들어가니 오히려 자유로웠다”고 돌아봤다. “그 어느 작품보다 내 얼굴에 신경 쓰지 않고 연기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염혜란은 사투리 실력도 걸출했다. 경자가 목포 사람이라는 설정에 따라 그 지역 배우에게 사투리를 배웠다. 마스크걸을 수소문하던 경자는 마트에 들어가 “(마스크걸 연락처를) 알아볼 방법이 없을까라우?”라고 묻는다. 염혜란은 “‘~라우’라는 어미는 목포에서만 쓰는 말투다. 모르는 할머니를 부르는 호칭도 지역마다 ‘할미’ ‘할매’ ‘할마씨’ 등 다양하다. 목포 토박이가 쓰는 표현을 풍성하게 구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K드라마 단골 소재인 모성애도 염혜란이 표현하니 달랐다. 그는 훼손된 모성애에 집념과 악의를 새겼다. 염혜란은 “아들이 죽은 후 13년 동안 경자의 모성애는 본질을 잃을 만큼 왜곡됐을 것”이라며 “악을 응징해 내 삶을 보상받겠다는 분노로 마스크걸과 맞붙었다”고 해석했다. 경자뿐 아니라 ‘마스크걸’엔 이상한 여자들이 득시글했다. 고현정·나나·이한별이 나눠 연기한 주인공 마스크걸부터가 그렇다. 염혜란은 “GV(관객과의 대화) 때 여성 배우들이 대부분인 환경이 낯설면서도 좋았다”며 “다양한 여성, 정형화되지 않은 여성을 보여주는 것이 배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몫”이라고 말했다.
“연기라는 건 누가 제일 잘했는지 비교해서 말할 수 없는 형태예요. 이번엔 제 장점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만나 칭찬받았을 뿐이고요. 저도 ‘내 연기 정말 이상한데’라고 느낄 만큼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시도까지도 해보고 싶어요. 선배들이 제게 그러더군요. ‘네가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훌륭한 연기를 할 때 가장 예뻐 보인다’고. 그 말을 믿고 계속 가는 거예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길 바라면서.”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