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감독 김성식)은 배우 허준호를 알차게 활용한다. 스크린에 허준호의 위압적인 인상이 가득 담길 때면 낯선 세계관과 설정은 금세 납득된다. 천박사(강동원)와 맞대결을 펼칠 때면 긴장감이 순식간에 고조된다. 작품에 완성도를 더하는 존재감이라니. 37년 차 배우의 관록에 감탄이 나오지만, 정작 본인은 “못내 아쉽다”며 미련이 가득했다. 영화 개봉을 이틀 앞둔 지난달 25일 서울 안국동 한 카페에서 만난 허준호는 “관객이 느끼지 못하는 화면 속 내 얼굴이 보이더라”면서 “다시 하면 더 잘할 것 같다”며 씩 웃었다.
극에서 허준호는 악귀 범천 역을 연기한다. 천박사의 조부(김원해)에게 봉인돼 동굴 안에 갇힌 그는 천박사와 유경(이솜)을 처치하고 자유의 몸이 되기만을 노린다. 허준호는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속도감과 재미에 푹 빠졌다. 인물은 최대한 간결하게 해석했다. “‘설경(귀신을 가두는 부적)을 뺏자’, ‘천박사는 내가 해치운다’는 생각뿐”이었단다. “관객에게 쉽게 다가가려면 나부터 그렇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시사 후 호평이 이어진 것을 두고 허준호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즐겨주셔서 감사하다”면서 “방대한 세계관을 가진 만큼 다음 행보를 위해 오락적으로 느껴지길 바랐다”고 했다.
허준호는 촬영 내내 할 몫을 해내야 한다고 되뇠다. 범천의 과거사가 풀리지 않은 만큼 서사를 뛰어넘은 연기를 보여줘야 했다. 대본에 집중하며 김성식 감독과 오랜 시간 대화를 거친 끝에 지금의 범천이 탄생했다. “내가 한 건 악귀 얼굴에 실핏줄 하나 더하자는 의견을 낸 게 전부”라고 말을 잇던 그는 “세세한 감정부터 컴퓨터 그래픽(CG)까지 많은 걸 물어가며 연습 또 연습했다”고 돌아봤다. “제가 할 수 있는 감정을 원초적으로 표현하면 감독님과 음향, 조명, 미술 감독님들이 그림을 만들어주셨어요. 저는 그저 최선을 다해 연기만 했죠.”
원조 액션스타인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걸출한 액션을 보여준다. 허준호는 “액션 때문에 도망가고 싶었다”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시스템이 바뀐 덕에 훨씬 더 편하게 연기했다. 더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제작 환경의 변화를 몸소 체감해온 만큼 달라진 현장에 뿌듯함이 커보였다. 그는 “날 찾아줄 때까지 액션 연기를 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1986년에 데뷔해 40주년을 향해 달려가는 노련한 이 배우는 여전히 연기가 좋고, 어렵고, 절실하다. 새 작품의 첫 촬영 날이면 언제나 떨린단다. 그는 “지금까지도 내가 잘했는지를 모르겠어서 주변에 계속 물어보고 다닌다. 늘 스스로에게 물음표가 가득하다”고 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허준호는 늘 자신이 마주한 인물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애쓴다. 그는 “연기가 여전히 어려워 미칠 것 같다”면서 “그럴수록 더욱더 캐릭터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표현을 잘 해내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기할 때마다 너무 어려워서 다시는 안 해야지 싶거든요. 그런데 또 하고 있어요. 신기하죠? 연기란 게 그래요. 연기자는 홀로 존재할 수 없어요.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배우를 배우답게 만들어주시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대본을 읽고 파악하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뭘 이뤄내려고 하지도 않아요. 그저 새롭게 펼쳐진 이 시대에서 오래오래 연기하고 싶습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